사과를 받았음에도 찬물에 뿌린 비누가루처럼 마음이 쉽게 풀어지지가 않았다. J가 아닌 속 좁은 나 때문에 말이다. 사과에 대한 대답 대신 주스를 권했다. 하지만 J도 마음이 무거웠는지 그 좋아하던 주스도 마다했다. 다시 권했다. 그제야 못이기는 척 두 컵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렇게 우린 암묵적으로 화해하고 다시 동행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여러 모로 부산과 꼭 닮았다. 국토의 동남쪽에 위치한 해양도시라는 점이 그 첫 번째고, 수도의 반대편 지역에서 그 역할을 보완해주는 제 2의 도시라는 점이 두 번째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부산 근처 남해에 해군사관학교가 있듯이 산티아고 데 쿠바 주변엔 비록 미군 소속이긴 하지만 근처 관타나모에 군사기지가 위치해 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의 대표곡이라면,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는 쿠바의 국민가요인 '찬찬(Chan Chan)'이 대표곡이다. 트로바 클럽에서, 혹은 국제적인 축제 때 들을 수 있다.
쿠바의 마지막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에 들어오니 '이젠 끝이다'는 시원섭섭한 마음이 감돌았다. 여기서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선물로 이틀 정도 푹 쉬고 아바나로 갈 계획이다. 아직 한창 오후였던지라 여유가 있던 우리는 먼저 아바나로 돌아갈 교통편을 알아보고 숙소를 정하기로 했다. 서로가 다른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나는 도로 언덕 위쪽에서 J는 20m정도 떨어진 도로 아래쪽에서.
당연히 기차를 타고 갈 거란 생각으로 난 기차역의 위치를 물었고 현지인에게 방향을 전해 받고는 J를 한 번 보고 출발했다. 당연히 뒤따라올 줄 알았던 것이다. 기차역은 언덕으로 이뤄진 도시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 다시 도심으로 가려면 고생스레 언덕을 넘어야 했다.
기차역에 도착해 시간과 요금을 알아내고는 J를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올 기미가 없었다. 말을 잘하니 어려움 없이 역을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모습이 보이지 않자 혹시 사고가 난 건 아닌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역무원에게 "혹시 자전거 타고 오는 '꼬레아노'를 보면 꼭 여기서 기다리게 하라"고 말해 놓고는 J를 찾으러 다시 센트로(시내)로 향했다. 급한 경사의 언덕을 오르는 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질수록 마음은 더욱 급해져만 갔다.
센트로에서 직경 2km 내로 돌로레스(Dolores), 마르떼(Marte) 등 광장과 공원만 6곳이 있다. 그간 두 번의 실종사건을 겪은 나는 지쳐서 공원에서 쉬고 있거나 혹은 숙소를 알아보고 있다고 판단, 일단 주요 장소를 돌아보면서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혹시 자전거 타는 동양사람 못 봤어요?", "실례합니다만 경찰 양반, 저 찾는 자전거 타는 사람 못 봤나요?", "아까 여기서 얘기하고 있던 친구 못 봤나요?", "이쪽으로 자전거 타던 청년 왔었나요?"
도시를 이 잡듯이 들쑤셔 봤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J를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하긴 이전에도 그가 사라질 때마다 상황예측이 전혀 안 됐으니 이번에도 같은 연장선상으로 밖에, 그리고 우연을 가장한 결말로 매조지 될 거라 확신 없이 자신했다. 그래도 모든 공원과 광장의 상인이나 길목마다 지키는 경찰들이 도통 보지 못했다고 하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녀석의 자취를 파헤쳐야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자전거로 한 시간을 돌아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일단 기차역으로 내려갔다. 유감스럽게도 역무원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관절 녀석은 어디로 숨은 걸까. 워낙 현지인과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는 J라 센트로 공원 주변에 미리 숙소를 잡고 담소를 나누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깔리기 전에 녀석이 밖으로 나와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답답했다. 연기처럼 사라진 그의 행적.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구석구석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쳐 두 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녔지만 허공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꼴밖에 안 되었다. 혹시나 싶어 또 기차역으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마다 언덕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부담감은 잔칫상 차려 놓자마자 설거지부터 걱정하는 격이었다.
역무원은 대답은 대쪽 선비처럼 한결 같았다. 옆에 과일 파는 상인에게도 물어봤지만 대답은 달라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었다. 달이 차고, 별들이 얼굴을 내밀 무렵까지 한 발짝도 진전이 없었다. 걱정과 불안이 짙어지고, 오만가지 상상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설마 납치는 아닐 테고. 녀석이랑 길이 엇갈렸나? 그렇다면 기차역에도 왔어야 했을 텐데. 어디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건 아닐까? 오, 하늘이시여! 오늘 저녁 진수성찬은 이렇게 물러가게 되는 겁니까?'
검정색 물감과 노란색 크레파스만 있으면 되는 빈 도화지처럼 도시는 가로등과 실내등만 빼고는 텅 빈 어둠으로 채워졌다. 대도시라고는 하지만 밤이 되면 사람 냄새 맡기는 역시나 힘들어진다. J를 찾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녀석도 나를 찾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동선의 꼬리라도 잡았어야 했다.
'아차! 그 녀석 여권과 돈도 내가 가지고 있구나', 생각해 보니 J의 여권과 여비의 대부분도 나에게 있었다. 원래 바닥이 드러난 잔고였지만 은행에 들러 환전한 타이밍이 좋아 지갑을 다시 넉넉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J가 이 밤을 어떻게 보낼지도 걱정 되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2시간. 2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경찰들은 친절했다.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부탁한 용무를 알아봐 준다고 했다. 내부에서 하는 건지 어쩐 건지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재차 부탁을 했지만 나를 진정시키며 웃는 채로 돌아오는 답은 한 가지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다른 경찰이 찾아보고 있습니다."
"제 친구 지금 여권도 없고, 돈도 아마 없을 겁니다.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할 텐데. 꼭 좀 부탁드릴게요."
J를 찾고자 경찰서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여기저기 수소문 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경찰이라도 'X-파일'의 멀더가 아닌 이상 아주 작은 단서하나 찾기가 힘들었다. 끈질긴 2시간이 지나고는 도시는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이대로는 두 발을 편히 못 뻗고 잘 성 싶었다. 경찰들도 어쩔 수 없다며 수상한 신고가 들어오진 않았으니 가서 기다리라고만 말해 줄 뿐이었다. 여권도 없는 녀석이 도대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지, 그것도 목격자 하나 없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오늘만은 초 절정 부르주아 모드 산해진미로 목구멍까지 차도록 식흥(食馫)을 즐기려던 진수성찬의 꿈은 저만치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져갔다. J도 그간 먹고 싶은 거 꾹 눌러 참으며 인고의 세월을 부대꼈는데 마지막 화룡점정의 점 하나 찍을 타이밍에 난데없는 돌발 상황이라니.
경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나라고 별 수 있겠냐 싶었다. 마지막으로 거위 똥에서 옥구슬 찾는 심정으로 도시를 한 번 쓰윽 훑어보고 나서는 모든 일은 하늘의 뜻에 맡기는 심정으로 자포자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때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에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그렇지, 이민국!'
과연 나는 어둠속에서 홀로 좌절에 질려 방황할지도 모를 J를 끝내 찾아내고야 말 것인가? 하지만 사건은 생각지도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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