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폭력과 폭언 등에 노출되어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은 MBC 의학드라마 <뉴하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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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본과 4학년 때였습니다. 서울 대형 병원에서 인턴을 하던 한 선배가 응급실 당직을 설 때 한 환자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응급실을 뛰어나가 택시를 타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선배의 아찔했던 사건은 그저 힘든 인턴 생활의 '무용담'쯤으로 회자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진료를 보고 있는 지금은 당시 한 선배의 응급실 탈출 사건은 하나의 무용담이 아닌 현실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의사 상해' 상상 이상지난 4일 부산의 한 병원에서 환자가 자신을 진료해 주던 의사를 흉기로 찔러 중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행스럽게 흉기에 찔린 의사는 현재 응급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의료 관계자들은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만 해도 지난 6월에 충남의대의 한 교수가 환자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서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지난 10월 31일 강원도 속초시에서는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의사가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응급실로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환자에 의한 의사 상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환자의 의사 상해 사건은 일반인들의 상상 이상입니다.
한정호 청주성모병원 내과 전문의는 "평균적으로 응급실에서 하루 1∼2건 정도의 폭력·폭언 사건이 발생한다"면서 의료 현장에 만연한 폭력·폭언을 증언합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중소 병원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원경찰이나 사설경비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는 대형 병원의 경우 의사들이 환자의 폭력과 폭언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받으며 진료를 할 수 있으나, 재정이 열악한 중소 병원의 경우에는 폭력과 폭언으로부터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등 그 문제가 심각합니다.
진료 일선에서 폭력과 폭언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의사들도 사람이기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도움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김주경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응급실에 도착한 경찰들은 의사와 환자의 문제이므로 양자 사이에서 해결하라고, 방관하고 지켜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10~15분 이상 늦게 오는 경우가 많다"면서 "신고 후 경찰이 와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신고해도 소용없다?현행 의료법에는 병원 내에서 발생하는 의사 폭행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 규정이 없습니다.
의료법 제12조에서 '의료인이 하는 의료행위에 대해서 간섭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고, 제87조에는 '의료기관의 의료용 시설 등을 파괴·손상하거나 의료기관을 점거하여 진료를 방해하거나 방조해서는 안 된다'는 진료 방해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도 최고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뿐입니다.
그러나 양승욱 의료 전문 변호사는 "해당 법들은 현재 실무상 거의 사용되지 않는 상태"라며 "해당 법들은 피의자인 의료기관의 고발이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병원은 지역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일선에서 진료를 보는 의사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료 관계자들은 "근래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버스운전사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가중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진료 중인 의사에게 폭행·상해·살인을 한 경우에 이를 가중 처벌할 수 있는 의료법 개정 운동을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양 변호사도 "병원 보호에 소극적인 현재의 의료현실을 볼 때 사후처리 규정 강화가 가장 현실적이다"면서 "의료인 폭행에 대한 가중처벌을 한다면 이러한 범죄 행위는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