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똥물사건 사진
민종덕
이때 정명자는 불사조라는 소그룹활동을 통해 한문공부, 노동법, 시사문제 등을 공부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노조 사정을 교회에 호소하는 한편 명동성당과 인천답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종교계 등 민주세력이 지원에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한 종교지도자들이 정부당국과 접촉하여 협상한 결과 단식농성은 풀었지만 협상안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노조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정명자는 김정자(방림방적), 김지선(삼원섬유), 김현숙(남영나일론), 진해자(남영나일론), 장남수(원풍모방) 등과 함께 1978년 3월 26일 50만여명이 모인 여의도 부활절연합예배장의 새벽기도회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이크를 탈취한 사건을 벌인다.
당시 동일방직노조 탄압 등 노동 현안인 '노동삼권 보장하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방림방적 체불임금 지불하라' 등을 외치다 6명 전원이 구속된다. 이른바 부활절 예배사건이다. 언론·집회의 자유는 물론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완전히 막힌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으로밖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회사측은 무단결근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예고 예외인정신청'을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이 신청을 '이유 있다'고 인정하여 4월 1일로 124명에 대한 해고통보를 하기에 이른다. 전국섬유노조본부는 4월 10일에 이들 124명의 해고자 명단을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조차 막아버렸다.
부활절 예배사건으로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정명자는 갈 곳이 없다. 회사에서는 이미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도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블랙리스트로 말미암아 취직한 지 2~3일이면 해고됐다. 정명자도 대농방직에 취직했지만 동일방직 경력 때문에 해고되었다. 이때부터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동일방직 원직복직은 물론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79년 들어 124명의 해고자들은 조직을 정비해 복직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기 모임화 했다. 동료 해고자 최연봉씨가 조직과 총무를 맡고, 정명자는 '동지회보'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이렇게 활동하는 중 1979년 10·26사건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던 유신정권의 정점인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이에 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회는 복직·복권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정권에 이어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4월 3일 복직·복권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제작 살포했다는 이유로 정명자는 포고령 위반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나머지 해고자들은 5·17 계엄 확대까지 한국노총 강당을 점거해 농성했다.
포고령으로 구속되어 2개월을 살고 나온 정명자는 '동지회보'를 계속 발행했다. 그러다가 82년도에 경동산업에 취업했다.
여기에서 약 2년간 일하면서 1984년도에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다시 해고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를 결성하고 노동법 개정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 활동을 하는 가운데 5·3사태 투쟁을 했고 87년 6·29 이후에는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상담을 하면서 신규노조 결성 지원 활동을 했다.
복직 투쟁에서 세입자 주거권 투쟁으로87년 11월에 도시빈민운동가인 정호성씨와 결혼한 정명자는 인천을 떠나 서울 미아 7동으로 이사를 왔다.
빈민운동가인 남편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빈민지역이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이기 때문에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명자도 이에 동의를 했다. 남편은 배터리 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미아 7동은 60년대 말 남산에서 철거된 사람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비영리민간탁아소였던 '어린이 사랑방'의 자모회를 꾸렸다. 그리고 이 자모회를 각 동과 연계하는 조직 활동을 했다.
95년부터 그 지역을 재개발을 하는 사업이 벌어지자 그녀는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재개발사업지에서도 가장 취약계층인 세입자들의 주거권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고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입자의 주거권운동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세입자대책위원회를 통해 임대아파트를 요구했고, 가이주(假移住)단지를 요구했다.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처음 결성할 때는 200여가구가 참여하였으나 철거투쟁을 하는 중 많이 이탈을 하여 마지막까지 43가구가 남았고 정명자는 이들과 함께 '미양마을'이라는 가이주 단지를 만들어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가이주단지에 입주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것은 'ㅁ건설'업체가 공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공사비만 받아 챙기고 부도난 상태에서 사라져 버린 사건이었다.
세입자대책위원회에서 가이주 단지를 쟁취한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다. 건설업자를 선택하는것 역시 투쟁하는 것 이상으로 힘이 드는것이다. 왜냐하면 지역주민의 대부분이 건설노동자들이어서 자신들이 한 번 지어보겠노라고 하기도 하고 업자를 소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 주민들을 설득하여 선택한 'ㅁ건설'은 일용노동자 기업으로 철거민 출신인 ㅈ씨가 운영하는 회사로 미아7동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지원하고 격려하던 주거연합과도 매우 밀접한 기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부도난 뒤 사라져 버린것이다. 부도를 내고 도주한 후라 찾을 수가 없었다. 1억이라는 거액을 건너줄 때 증인으로 있었던 당시 주거단체 대표도 'ㅁ건설'의 부도에 대해 증언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머지 돈으로 업자들을 불러 모아 사정을 이야기 한 후 재료값과 인건비만을 지급하여 가이주단지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녀는 정신적 심리적 신체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녀는 세입자운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얻은 것은 운동이란 이념과 신념과 당위성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도덕성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매우 보편적인 진실을 생활화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입자 일을 마무리하고 난 뒤 한 3년 가량을 심한 우울증과 갑상선 항진증을 앓았다. 그만큼 그 일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더불어 살고자 한다. 그래서 참교육학부모회,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해 왔다.
그녀는 앞으로도 살아온 삶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자아의 정체감을 되살려서 지역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더욱더 자신을 낮추면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도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6년에는 서울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