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공중화장실은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배려하지 않는 듯한 '허술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의미의 프라이버시를 배려하기 위한 미국적 설계구조다. 문 아래와 위, 그리고 벽 사이에 넓은 틈이 보인다.
강인규
공중화장실은 기묘한 장소다. 모든 이에게 열린 가장 공적인 장소인 동시에 개인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집단을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을 맞아야 하는 모순, 그것이 공중화장실의 운명이다.
어느 곳이든 공중화장실은 '공개된 비밀장소'라는 모순적 정체성을 지닌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좀 더 유별난 모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참견 마'와 '날 좀 내버려 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미국인들이 누군가. 이미 19세기 후반에 역사상 처음으로 '사생활권'을 법적 권리로 선언한 사람들 아닌가. '프라이버시'는 흔히 '혼자 있을 권리'로 정의된다. 이 표현은 1890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미국인들의 삶에서 '혼자 있을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개인 공간의 보호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권리에는 외부인으로부터 신체적 안전, 시선의 배제, 심리적 안정 등 여러 사항이 들어있다. 브랜다이스는 새뮤얼 워렌과 더불어 '사생활권'을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의 고통·기쁨·이익에서 물적 대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감정·느낌까지도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그렇다면 미국의 공중화장실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에 공중화장실이 존재하는 만큼, 사용자의 '생각·감정·느낌까지도' 배려하는 구조로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런가? 미국의 공중화장실을 한 번 들여다보자.
견고한 공중화장실의 낮은 문, 넒은 틈 일단 미국 공중화장실은 매우 견고한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좌변기를 둘러싼 철제담장은 어떤 외부충격도 견뎌낼 것 같다. 실제로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같은 폭풍을 만날 때 가장 바람직한 대피장소로 거론되는 곳 중 하나가 공중화장실 좌변기칸이다.
담장을 벽에 고정시키는 새끼손가락 두께의 나사도 믿음직스럽고, 문을 지탱하는 강철 빗장도 사용자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어딘가 어설픈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 아래의 빈틈이 눈에 거슬린다. 바닥에서 거의 무릎 아래까지 뚫려있지 않은가.
문 아래의 틈으로는 사용자의 다리가 훤히 드러난다. 누우면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이래서는 아무리 단단한 구조물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문의 높이도 턱없이 낮다. 키가 큰 사람은 발꿈치를 들지 않고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키가 크지 않아도 안을 들여다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담과 벽 사이, 그리고 문과 문틀 사이에 손가락 한두 개가 들어갈 만큼 넓은 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이를 동반하고 화장실에 들른 부모들이 원하지 않는 '까꿍' 놀이를 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문 아래로 부모의 표정을 지켜보기도 한다. 도대체 왜 '프라이버시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물론 미국 공학기술의 문제는 아니다. '사생활권'에 그토록 집착하는 미국이니, 공중화장실의 사적 권리를 무시할 리도 없다. 미국 화장실의 '낮은 문'과 '넓은 틈'은 미국인들의 독특한 프라이버시 관념을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