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벼가 익어가는 논.
이정근
슬며시 왔다 가버리는 심양의 가을무더위가 지나갔다. 입추가 지나고 처서인가 싶었는데 어느덧 찬바람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심양의 가을은 유난히 짧다. 왔는가 싶었는데 가는 줄 모르게 가버리는 것이 심양의 가을이다. 조선에서 끌려온 신하들의 목숨은 부지했지만 노구를 이끌고 차가운 감옥에 있을 김상헌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저하! 왜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견딜 수 있겠지만 김상헌이 걱정 되오." "설마 저들이 살아있는 목숨 얼어죽이고 굶어죽이기야 하겠습니까?""저들이 밥을 넣어주지 않아 우리 관중에서 식량과 찬거리를 넣어주는데 상헌이 아직 홑옷을 입고 있다 하오.""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멀쩡한 사람을 붙잡아 왔으면 먹여주고 입혀주어야지 70노인에게 아직 홑옷을 입게 하고 있다니…."강빈이 벌떡 일어났다.
"저하! 침장에게 일러 내일 당장 솜바지를 지으라 하겠습니다.""빈궁의 마음이 따뜻하구려."소현은 강빈을 지긋이 끌어안았다. 품속에 안겨있던 강빈이 눈을 깜빡였다.
"저하! 일꾼들이 공사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지으려 하십니까?""빙고를 지으려 하오.""네?"강빈이 품속을 빠져 나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음 창고를 지어서 무엇에 쓰시려구요?""지난 여름 무더위에 관중사람들이 너무 고생이 많았소. 그들에게 내년 여름에는 시원한 물을 먹이려고 그러하오."배후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라는 것을 깨달았다지난 여름 혹독한 무더위에 관중 노복들이 퍽퍽 쓰러졌다. 일사병과 돌림병에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현은 요하가 결빙되면 얼음을 떠 빙고에 보관하였다가 먹이려 한 것이다.
"저하께서 빙고를 지으려 하시는 거 소첩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곧 돌아갈 것이온데 얼음 창고를 지어 얼마나 쓰시려고 그러십니까?""빈궁의 마음을 이해하오. 우리의 소원은 하루 빨리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지만 저들의 행태로 보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소현이 끌려올 때 조선의 전투력이 청나라에 대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볼모 생활이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 기간이 길어야 3년이면 족하리라 예상했다. 그렇지만 볼모 생활 5년째다. 자신의 예측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전투력 확인이 아니라 명나라와 조선이 연합하여 배후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싫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얼음 창고가 필요합니까?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국에 있는 석철이가 보고 싶습니다."강빈이 소현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흐느꼈다. 강빈의 목소리는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절규였다. 세자관 증축공사를 벌일 때 본국에 상소를 올리며 반대하던 신하들도 적극 동조했다. 그렇지만 소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명수가 세자관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