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탑 표지석 중국정부에서 심양에 세운 표지석
이정근
"어디에서 왔소?""피안도 선천에서 왔수다.""고향에 부모님은 계시오?""아반은 돌아가셨고 70 넘은 어마이가 계시는데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릅네다."상처투성이 손등으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보덕! 이 자를 사시오."동행한 조계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건장한 사람을 사들여야 하는데 강빈이 찍은 사람은 비루 먹은 망아지처럼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에서 왔소?"저고리를 입은 포로 앞에 강빈이 발길을 멈췄다. 흰색치마가 잿빛으로 변한 차림이었으나 기품으로 보아 여염집 아낙 같지는 않았다.
"강도에서 왔습니다.""강도라면 강화도 아니오?"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강보에 싸인 석철이를 내관에게 넘겨주던 일이 강빈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강화도입지요.""지아비는 무엇 하는 사람이오?"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때, '오랑캐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윤선거의 아내 이씨는 목을 맸고, 홍명일의 아내 이씨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밖에 이정귀의 아내 권씨, 여이징의 아내 한씨 등 수많은 부녀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헤일 수 없이 많은
아녀자들이 끌려왔다. 혹시 사대부집 아낙이 아닐까 해서 물었던 것이다.
"이곳에 끌려와 만신창이가 된 몸, 지아비를 밝혀 무엇 하겠습니까?"여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이들은 몇이나 되오?""사내아이 하나에 젖먹이 계집아이를 두고 왔습니다.""고향에 돌아가야지요?""…."강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인이 팔뚝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것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자의 서러운 오열이었다.
"보덕! 이 아낙의 값을 지불하시오."그동안 세자관에서 포로를 속환한 일이 있었으나 대부분 권력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비록 농사짓기 위한 매입이었으나 순수한 백성들 속환은 강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걸음을 옮기던 강빈이 건장한 사내 앞에 멈췄다.
조선 관리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조선인 포로"조선 사람이오?""그렇소. 근데 노예를 사러 나왔으면 일 잘할 사람을 고르면 되지 출신은 왜 묻소?"사뭇 시비조다. 동행한 보덕과 통역을 째려보던 사내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사려고 그러하오.""나를 끌고 나온 노예장사꾼이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해 하는 말인데 노예를 사고 싶거들랑 나를 사지 마시오. 난 팔리기만 하면 도망갈 사람이오. 고국에 돌아가 또 다시 잡혀오는 한이 있어도 난 도망갈 사람이란 말이오."사내의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제야 관복을 입은 보덕과 통역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내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조선에서 끌려온 포로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탈주하여 고국에 돌아갔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그 길은 목숨을 건 험난한 길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큰 기침 한번하면 조선에서는 탈주 포로를 붙잡아 강제 송환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끌려온 포로들은 조선 관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증오감을 표출했다.
민회빈 리스트?필요한 숫자만큼 포로를 사들이지 못한 강빈은 이튿날도 노예시장에 나갔다. 조선인 포로들에게 다가간 강빈은 "나이든 부모님이 계시냐?"를 물어 있다면 사들였다. 특히 여자들에게 "아이가 있느냐?"를 물어 아이를 조선에 두고 왔다면 무조건 사들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동안 '도망치는 노예'로 낙인 찍혀 상품가치가 하락했던 조선인 포로 값이 폭등했다. 심양은 물론 요양과 통원보, 봉황성에서도 조선인 포로를 끌고 왔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지배한다 했던가. 갑자기 조선인 포로들이 넘쳐났다. 강빈은 조선인이 확인되면 사들였다. 동행한 조계원은 의아했다. 험한 농사일을 하려면 힘센 사람을 사들여야 하는데 강빈이 골라낸 사람들은 대부분 허약했다. 하지만 강빈의 생각은 달랐다. 동기를 부여하면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믿었다.
평복을 했지만 강빈을 알아본 포로들이 "빈궁마마! 저를 사주세요"라고 애걸했다. 강빈의 마음은 미어졌다. 모두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자관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다. 사주지 못한 강빈의 마음은 쓰라렸다. 그렇지만 강빈은 '쉰들러'보다 300년이나 앞서 '민회빈 리스트'를 몸소 작성하며 실행한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