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 화백
신학철은 어떤 작가였던가. 정말 그는 국가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국가전복을 꾀하고 있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을까. 에둘러 답해본다. 1989년 <월간 미술>이 80년대를 마감하며 기획한 '80년대 한국의 대표작가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이 있었다.
평론가 15인이 선정한 작가들 중 최다득표(9표)를 한 사람이 바로 신학철 화백이었다. 이 사실은 신 화백을 미술계가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 화백은 194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1968년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본래 사물의 해체와 재구성작업에 몰두하는 '아방가르드 작가'였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한국 근대사 사진집을 보고, 이를 포토 몽타주로 재현한 '한국근대사' 연작을 통해 1980년대의 한 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이 연작을 본 시인 황지우는 "모더니즘의 뒷문을 열고 나왔다"고 썼으며, 미술평론가 김윤수는 "우주에서 운석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고 썼다. 탱화적인 구성에 목판화 운동이 대세이던 1980년대의 민중미술 운동에서 그는 특유의 포토몽타주 작업을 줄기차게 시도하였고 그 결실로 1991년에 제1회 민족미술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잘 나가던' 신 화백은 시련을 맞는다. 앞서 본 <모내기> 사건 때문이었다. 1987년에 그린 <모내기> 그림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구속된 그는 이후 10년 가까이, 평소 알지도 못했던 법과 씨름해야 했다.
발단은 1989년 한 지역 청년단체가 <모내기>를 새겨넣은 부채를 배포하면서부터였다. 수사기관의 레이더망에 이 부채 속 그림이 딱 걸리게 되고, 결국 수사기관은 원작자가 누구인지 수소문까지 한 뒤 신 화백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기소하게 된다.
신 화백이 모내기 사건으로 긴급체포된 1989년은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특히 공안합동수사본부를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 기소 인원이 급증하던 때였다.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저 '시대 기류'를 탄 사건인 셈이다.
모내기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은 예술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래서인지 1심과 2심에서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건 발생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 열린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이를 파기하고 유죄 판결하면서 이에 대한 논란이 재현됐다.
이 판결에 따라 열린 환송심(1999년 8월 13일)에서 서울지방법원 형사항소3부(김건홍 부장판사)는 신 화백에게 대법원 판시대로 모내기에 대해 '이적(利敵) 표현물'로 유죄판결하였고 대법원 제2부(주심 이용훈 대법관)는 그해 11월에 신 화백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0월형의 선고유예와 그림몰수 등 유죄판결을 확정하였다.
모를 심으려면 쓰레기를 걷어내야 한다그렇다면 <모내기>가 진짜로 '적(?)을 이롭게 하는' 작품인지 살펴보자.
애초 <모내기>는 신 화백이 지난 1987년 8월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가 주최한 제1회 통일전에 출품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통일전'에 출품하는 만큼 그는 통일의 이야기를 이 그림을 통해 말하고 있다. 즉 <모내기>는 통일의 이야기를 벼농사의 전 과정을 통해 아래에서 위로 시기별 순서대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모를 심기 위해서는 논을 쟁기로 갈고 물을 끌어대고 써레로 고르면서 나뭇가지나 돌멩이, 비닐봉지 등 불필요한 쓰레기들을 걷어내야 한다. 모를 심는 것처럼 통일을 하려면 통일에 저해되는 요소들을 쓸어내야 한다. '통일에 저해되는 요소'는 뭘까, 통일을 가장 싫어할 것 같은 군사독재정권이고, 미국도 일본도 우리의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도 세상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또 통일된 세상에서는 38선의 철조망과 군사무기도 없어져야 할 것들이다. 이런 저해요소를 쓸어내고 모를 잘 심어서 거름을 주고 논을 메고 벼를 잘 자라게 하여 가을에 풍년이 되어 벼를 베며 돌밥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통일된 세상의 즐거움으로 나타내고자 했다."신 화백의 말처럼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와 정서로 외세의 물신주의를 몰아내는 착상의 이 그림은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를 몰아내는' 화면 구성의 특징 때문에 '북이 남을 쓸어내는' 곧, 북한이 남한을 끝장낸다는 식의 공안적 검열에 걸리고 만다. 그림 속의 초가가 김일성의 생가를 그린 것이라는 공안검찰의 친북(?)적 해석도 있었다.
대법원이 하급심의 무죄판결을 유죄취지로 파기한 근거는 다름아닌 홍종수씨의 감정 내용이었다. 홍씨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각종 상징물을 남북한에 실재하는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사실적 표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그림이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림 곳곳에 배치된 상징물들을 '농민의 써레질=남한의 농민들이 미·일 제국주의자, 매판자본가, 반동관료배 등을 쓸어버리고 반외세투쟁을 전개하는 것' '백두산=혁명의 성산' '시골의 초가집=만경대' '평화로운 농민들과 어린이들의 모습=북한 농민과 북한 어린이의 행복한 모습'이라는 식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신 화백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해석의 자유를 누리세요'라고 편히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해명의 맨 마지막 문장이 가슴 아프다.
"서울에서 고향을 생각할 때면 마을 앞 파란 보리밭과 초가지붕 위로 연분홍빛 살구꽃이 피어 만발한 고향의 봄은 꿈만 같아서 무릉도원의 이미지로 그렸다. 백두산을 그리게 된 이유는 전시회의 주제가 통일이기 때문에 그렸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받은 반공교육(반공포스터나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는 구호 등) 덕분인지 몰라도, 나는 통일의 이미지로 백두산의 형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통일은 정말 좋은 것이고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그리려고 했다. 모내기 그림은 이런 단순한 생각에서 그려졌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