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동상.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유적지 소재.
김종성
이와 같이 <이산> 제67회에서 정조와 정약용이 드디어 첫 만남을 가졌다. 능력은 홍국영보다 훨씬 더 탁월하면서도, 사심은 홍국영보다 훨씬 더 적은 정약용이 정조의 곁에 다가섰다. 최측근 홍국영을 내친 ‘적적한’ 정조 임금에게 그야말로 ‘물건 중의 물건’이 굴러들어온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2세 때인 정조 7년(1783)에 성균관 유생이 되고 경의진사(經義進士)의 신분으로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기 이전까지 정약용은 어떻게 살았을까? 성균관 유생이 되기 이전까지의 그의 삶 속에서 정약용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세 가지 키워드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나?
정약용 집안은 고조 이후 삼대가 포의(布衣, 관직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난 집안이었다. 아버지 대에 와서 진주목사나 호조좌랑 등을 지내긴 했지만, 그의 집안은 이미 권력의 중심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 있는 가문이었다.
이처럼 집안이 당시의 권력 중심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약용이 보다 더 자유롭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논문도 있다. 성균관 유생 출신이면서도 서학이나 실학 등 다양한 사상에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