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 인조반정군은 창의문을 통과하여 도성에 진입했다. 이후 역모에 노이로제에 걸린 인조는 창의문을 폐쇄했다.
이정근
고개를 번쩍 든 한씨는 주저 없이 옷고름을 풀었다. 어깨위에 별빛이 내려앉았다. 상아를 깎아놓은 듯한 귀밑선이 아름다웠다. 치마를 내렸다. 달빛이 한씨의 속살에 내려앉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바위에 서 있는 한씨는 "자 보아라. 깨끗하지 않느냐?" 내려다보고 있는 달님에게 항의하는 것만 같았다.
한씨는 자그마한 소(沼)에 몸을 던졌다. 차가웠다. 삼각산 비봉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한씨는 몸을 박박 문질렀다. 자갈을 주워 피부에서 피가 흐르도록 미친듯이 문질렀다.
목욕을 마친 한씨가 바위로 다시 올라왔다. 물에 젖은 한씨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굴을 감싸 쥔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세상이 미쳤다. 미치지 않고선 이럴 수 없다. 훌훌 벗고 달밤에 몸을 씻는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쳤단 말이다. 세상이 미치지 않았다면 내가 미쳤단 말인가? 나는 미치지 않았단 말이다."물이 흐르는 그녀의 살갗에 피가 흐르고 그 위에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물과 눈물과 피가 범벅이 된 그녀의 피부가 별빛에 번들거렸다. 바람이 분다. 물기 젖은 그녀의 나신이 눈부신 듯 달님마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에선가 새벽 예불소리가 들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물안개가 피워 오르고 동녘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은 한씨는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민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였다.
세검정 주변에는 장판을 만들어 시전에 내다 팔거나 종이를 만들어 관가에 납품하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종이를 만드는데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장인들이 모두 잡혀가고 도망갔던 장인들이 돌아와 겨우 명맥을 이어왔으나 이번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