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절요. 성리학을 요약한 책.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함몰되어 여자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정근
인륜과 인정의 갈등 속에서 그들은 괴로웠다. 부모형제 친구들에게도 털어놓고 얘기할 사안이 아니었다. 이러한 괴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벗이 술이었다. 한씨의 남편도 작부가 있는 술집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온 것이었다.
"저 여자를 대문 안에 들여놓지 마라."발치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한씨를 야멸차게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당쇠가 한씨 옆으로 다가왔다.
"웬 여자가 새벽부터 울고불고 난리야? 재수 없게스리…. 소금이라도 뿌려야겠구만."마당쇠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뒤돌아섰다.
"얘, 장쇠야!"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댁은 뉘신데 남의 집 종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요?"생뚱한 얼굴로 장쇠가 한씨 곁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엎드려 있던 한씨가 얼굴을 일으켰다.
"아니, 마님이 꼭두새벽에 웬일이세요?"화들짝 놀란 장쇠는 순간, 뒤통수가 아찔했다. 돌아오는 며늘아기는 절대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는 대감마님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밖에서 쫓겨나는 환향녀"장쇠야. 경복이 얼굴이라도 한 번만 보여 다오."흐느끼는 한씨를 대문밖에 두고 장쇠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장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감마님께 여쭈었다가 경만 치고 나왔습니다요. 제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죄송합니다."머뭇거리던 장쇠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문밖에 엎드려 오열하던 한씨가 일어나 문고리를 잡고 틈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였다. 경복이가 마당에 나와 깡충깡충 뛰며 감꽃을 줍고 있었다.
"경복아!"불러보았지만 목울대만 뜨거워올 뿐, 목소리가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한씨는 발길을 돌렸다. 골목을 빠져나오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리운 가슴 지아비의 품도, 보고 싶은 아들 경복이의 얼굴도 없었다. 장동 골목을 빠져나온 그녀의 등 뒤로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온 한씨는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이상야릇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향기도 없었고 온기도 없었다. 차가웠지만 뜨거운 웃음이었다.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여자만이 웃을 수 있는 비소(悲笑)였다. 전쟁의 참극을 몸소 체험한 여자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흘리는 웃음을 후대의 사람들은 '환향녀의 웃음'이라고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