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당시 미국의 13개 식민지들. 동쪽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모습(붉은 색으로 표시)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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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식민지에는 부와 권력을 쥔 유지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영국에서 독립하면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이 독립하는 줄 아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별개의 화폐를 만들고 멋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물론, 개별적으로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기도 했다.
앨리스테어 쿡은 <아메리카>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영국과 싸워 이긴) 전승의 기쁨이 사그라지자, 그들을 묶어주던 유대감도 느슨해졌다. 재난의 피해자들이 경험하듯, 신체적 위험만큼 사람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폭풍우가 사라지자 그들은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그들은 주권을 쟁취한 기쁨에 젖어 있었으나, '미국인'으로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각기 뉴욕인으로서, 조지아인으로서, 메릴랜드인으로서, 버몬트인으서 그러했다. 각 지역이 독립국처럼 행동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앨리스테어 쿡의 아메리카>, 127쪽)
이들의 관심은 어떻게 자신이 속한 지역의 이익을 확장할 것인가였다. 유일한 전국조직이라고는 지역 대표들이 모인 '대륙회의'라는 느슨한 모임이었다. 지역 대표들은 공동 규약을 정하고 대표를 뽑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하든 자신들이 지역에서 누리고 있는 권리와 이익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왜 직선제를 거부했나미국의 선조들은 군주제와 공화제를 두고 씨름한 결과 공화제를 선택했으나,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도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싶지 않은 주정부와 이들을 통제해야 할 운명을 지닌 중앙정부 사이의 타협이었다. 여기에 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선제는 별로 바람직한 대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교통도, 언론도 발달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자기가 잘 아는 지역 후보를 고를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구가 많은 주의 후보가 대통령직을 독점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리저리 흩어져 사는 유권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투표하는 것 자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대륙회의의 참석자들은 대중의 판단력을 잘 믿지 못했다. 오늘날처럼 잘 교육받은 국민도 무시하는 게 정치인들이니, 공교육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일반 대중이 책이나 언론매체를 통해 지식을 쌓을 기회도 많지 않던 18세기 후반에는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얼마 후에 들려온 프랑스 혁명 소식은 미국 지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방식은 조금씩 바뀌어 왔지만, 최초의 철학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유권자와 후보 사이에, 주와 중앙정부 사이에, 그리고 주와 주 사이에 '완충지대'를 두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투표다.
중앙정부는 선거인단 선발을 주의 재량에 맡김으로써 자치권을 보장했다. 각 주의 선거인단 규모는 인구비례로 정하되 작은 주에도 최소의 수(현재 3석)를 보장함으로써 머릿수로 밀어붙일 때 생길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장치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