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죽었잖아, 눈물 안 나오니?"

[取중眞담] 기자들의 질문이 이해 안되는 명학초 학생들

등록 2008.03.20 18:50수정 2008.03.2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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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실종된지 두 달여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혜진양의 친구들이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실종된지 두 달여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혜진양의 친구들이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헌화하고 있다.남소연

"아줌마, 기자들은 왜 그래요? 혜진이 장례식 때 잠깐 눈물이 멈춰서 가만히 있으니까 마이크 들이대고 '너는 왜 안 우니? 눈물 안 나와?' 그래요. 그래서 울면, 갑자기 여러 군데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어요."

혜진이와 예슬이가 다니던 안양 명학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잔혹한 유괴범죄의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듯 했다. 엄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끌탕하며 교문 앞을 지켰지만, 애들은 친구들과 장난치며 한 손에는 종이컵 슬러시, 다른 한 손에는 신문종이에 싼 마른 오징어다리 열 개를 쥐고, 입속 가득 질겅질겅 씹고 다녔다.

혜진이·예슬이 얘기를 꺼내면 애들은 "슬퍼요" "보고 싶어요" 등등 재잘재잘 말도 잘했다.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철부지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경찰이 드나들고, 방송차량이 상주하며, 기자들이 왔다갔다 하는 게 마냥 신기한 눈치였다. 

"기자들 얘기 듣다가 안 울면 나쁜 아이 같아요"

동심에 젖은 아이들은 그저 장난하는 게 좋고, 그날그날 숙제가 버거우며, 학원 가기 싫으니, 날씨 좋은 봄날 놀이터에서 엄마 몰래 '땡땡이'를 칠 방법이 없을까 골몰하는 듯 했다. 그게 애들이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 "그런데요, 아줌마"라는 꼬리표를 달고 수십 가지 얘기를 쏟아내는 꼬마아이들은 친구의 허망한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과연 기자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 듯 하다.

고작 열두 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이지만, 그들의 눈에도 기자들의 유도질문과 연출된 화면은 '진실'과 거리가 멀어보였던 모양이다. TV뉴스나 신문 사진기자들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죽었잖아, 왜 안 울어?'라고 묻고, 그래도 멈칫 하면 '너는 울음 안 나오니?' 한 번 더 추임새를 넣어 꼭 울게 만드는 게 좋지 않았던 거다.


일찍 철이 든 6학년 아이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지만, 대개는 신나게 놀다가 '혜진이·예슬이' 얘기를 꺼내면 갑자기 우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쳤다. "기자들은 우는 어린이를 좋아한다"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몇몇 아이들은 '매스컴 울렁증'이 있다며 카메라를 피했다. 그중 한 아이는 "기자들의 얘기를 듣다 울지 않으면 꼭 나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슬픈 일이지만 눈물이 안 날 수도 있는 건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안양 초등학생 유괴 실종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정모씨가 범행을 자백했다고 알려진 가운데, 김병록 안양경찰서 형사과장이 17일 오후 고 이혜진양과 함께 실종된 우예슬양도 수색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양 초등학생 유괴 실종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정모씨가 범행을 자백했다고 알려진 가운데, 김병록 안양경찰서 형사과장이 17일 오후 고 이혜진양과 함께 실종된 우예슬양도 수색중이라고 밝히고 있다.남소연

'쉽게 취재'하는 관행 굳어지면 진짜 진실 왜곡할 위험

고백하자면, 취재할 때 그 상황에 맞는 말이나 장면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상황에 맞는 멘트를 할 때까지 질문공세를 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대개 카메라기자들은 사건에 적합한 화면을 보도하고 싶어 한다. 장례식장에서 웃는 아이들의 사진을 쓸 수 없으니까.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마찬가지로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기자는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전달하기 보다는 의미에 맞는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억지로 의도된 왜곡이 아니라면 본질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적합한 것이라고 합리화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취재원들도 언론이 잘 보도할 수 있도록 맞춰주는 홍보의욕이 앞서기도 한다"며 "실제 기자와 취재원 간의 이런 공생이 일상적으로 관행화 된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자와 취재원이 이런 방식으로 상호공존하다 보면 사건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파고들어 정작 '진짜 진실'과는 멀어지는 보도를 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쉽게 취재하는 관행이 굳어지면, 부지불식 간에 본질을 왜곡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몇 가지의 패턴을 가지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그림' 하는 식으로 꿰맞추기 취재를 하면서 관행화 된 틀을 깨지 못하면 결국 기자 스스로 진실 접근을 차단하는 꼴이 된다는 문제 지적도 했다.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 이혜진양의 자리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양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흰 국화와 편지가 쓸쓸히 놓여있다.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 이혜진양의 자리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양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흰 국화와 편지가 쓸쓸히 놓여있다. 남소연

상황에 맞는 그림찾기...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지난 19일 명학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혜진이와 짝꿍이었다는 현정(가명)이는 "혜진이가 엄청 착했다"며 "귀엽고 발랄했으며 많이 웃던 아이였는데 나쁜 아저씨가 죽였다"고 원망했다. 현정이는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며 "혜진이를 죽게 한 그 아저씨도, 혜진이 장례식 때 '너는 왜 안 우니' 한 아저씨도 잘 이해가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동안 혜진이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불쑥 한 녀석이 끼어들었다.

"아줌마, 기자 되면 뭐가 제일 힘들어요?"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양어린이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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