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쪽지<정은서점>에는 감시카메라가 없습니다. 둥근거울도 없습니다. 오로지, 이곳을 찾아오는 책손님들 마음됨됨이를 믿을 뿐입니다. 다만, 가방을 메고 골마루를 누비면, 책탑이 무너질 수 있으니 문간에 가방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으로 책을 구경해 주면 서로한테 좋습니다.
최종규
한갓 말장난이나 말재주는 시가 아니지만, 우리 세상에는 말장난과 말재주 피우는 시만 넘친다면서, 사람들한테 참된 시 문화를 일러 주고 싶어서 엮었다고 하는 <김정환,백원담 엮음-다시금 사랑으로 이 지상에 선다면>(동녘,1985)이라는 시모음을 집어듭니다.
정현종, 신경림, 고은, 오규원, 강은교, 신동엽, 김수영, 최민, 김명인, 황지우, 송기원, 이성복, 김규동, 도종환, 김지하, 정규화, 신대철, 황명걸, 김용택, 김병걸, 문병란, 장영수, 이종욱, 이동순, 최승자, 홍영철, 양성우, 조태일, 박노해, 박영근, 백기완, 박봉우, 윤재걸, 김준태, 김창완, 정희성, 하종오, 이영진, 이런 이름들을 죽 봅니다.
시 쓴 사람들 이름을 죽 보다가, 엮은이 말도 찬찬히 읽어 보다가, 실린 시를 하나하나 읽어 보다가, 어느덧 스무 해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사람들 시는 꾸준히 읽히고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3〉 일본 책 문화<朴趾源/今村與志雄-熱河日記 (1)>(平凡社,1978)라는 책을 봅니다. ‘하나’라는 숫자가 붙었으니 적어도 두 권까지는 나왔을 테지요. 일본에서 번역해서 낸 <열하일기> 책띠에 적힌 말을 읽어 보니, ‘조선지식인이 중국을 둘러본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조금 크면서 단출하게 생긴 책입니다.
두꺼운 종이로 책껍데기를 마련해서 깨끗하게 간수할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책상자라고 할까요. 고급스러운 상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책이 다치지 않을 만큼만 돌봐 주는 두꺼운 종이 상자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때 이런 책상자에 담아서 책을 내는 일이 유행인 적이 있는데, 요즈음 나오는 책상자는 다들 아주 번들번들 번쩍번쩍 합니다.
책도 물건이기 때문에 좀 더 값나 보이게 하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고, 책꽂이에 모셔 놓은 모습이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하게 보이도록 하고픈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겉치레나 내세움이 책다운 모습일까요. 책을 참으로 아끼거나 돌보려는 마음으로 마련해 놓는 책상자란 어떤 모습일까요.
열 해쯤 앞서, 인천에 있는 어느 헌책방에서 산 책이 떠오릅니다. 국문학을 다룬 50년대 책이었는데, 먼젓 임자는 하얀 두꺼운 종이로 책상자를 만들어서 넣었고, 책도 마분지로 쌌고, 마분지 등쪽에 얇은 종이를 붙이고 펜글씨로 책이름을 적었습니다.
나중에 이 책에 얽힌 이야기를 헌책방 아주머니한테 들었는데, 먼젓 임자 되는 분이 ‘당신 아들을 자기와 같은 국문학자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국문학을 다루는 옛책이나 소중한 책을 몇 백 권, 이렇게 마분지로 책을 싸고 상자를 손수 하나하나 만들어서 넣어서 간수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 아들은 국문학에는 뜻이 없고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하여, 눈물바람으로 ‘당신이 애써 손질하며 마련해 놓은 책’을 헌책방에 내놓게 되었답니다. 일본 평범사에서 번역한 <열하일기> 책상자를 보니 꼭 그때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