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 서울대본'막필로 썼으니 보시는 양반님네들은 글씨 흉을 보시지 마시고 눌러 보시고 글씨 잘못 쓴 죄를 용서'라는 필사자의 변이 적혀 있다.
프로네시스
18세기 후반에 서울, 전주, 안성 등지에서 상업적으로 간행한 목판 인쇄물, 이른바 ‘방각본’ 소설은 책값이 상대적으로 싸서 하층민들이 즐겨 읽었다.
그러나 세책점에서 빌려 주었던 고소설은 대체로 필사본이었다. 이 필사본 고소설은 여러 사람이 읽어야 했으므로 튼튼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세책본의 단가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필사본을 즐겨 찾은 이들은 주로 사대부가 여성 등 중산 계층이었다.
지속적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세책점에서는 장편소설을 선호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세책점의 대여 목록에는 186권에 달하는 <윤하정삼문취록>이나 139권의 <임하정연> 같은 국문 대하소설과 10책짜리 <춘향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에서 보듯 이 필사본 세책은 대체로 한 권당 서른 장 내외의 부피였는데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는 150자 내외로, 일반 필사본이나 방각본의 반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대여되는 책에는 독자들이 남긴 낙서도 심심찮았다. 도발적 낙서에 붙인 주인의 댓글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의 사는 모양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부터 세책에 오탈자가 많다든가 세책료가 비싸다는 불평과 항변, 욕설과 음화(淫畵)에 이르기까지 세책에 남은 옛 사람들의 자취도 각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책 주인 들어보소. 이 책인 단권인 책을 네 권으로 만들고 남의 재물만 탐하니 그런 잡놈이 또 어디 있느냐?” - <김홍전>“이 말이 짧으나 한 권으로는 너무 많은 고로 부득이 이십여 장씩 두 권으로 묶었으나 세전을 더 받고자 함이 아니니 보는 이는 허물치 마시오.” - <만언사>조선 후기 사회사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한 이 책은 자료의 한계를 뚜렷이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현재까지 전하는 세책본과 관련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조선 후기 문인들과 일부 외국인의 글을 통해서 당대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또 여러 장으로 나눈 서술체계의 중복도 분명한 구분과 이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과 소설의 유행을 마치 여러 장면의 영화처럼 제시해 주는 것은 이 책의 미덕이다. ‘조선 후기의 독서 풍경’, ‘조선의 문화 상품’, ‘향목동 세책 거리를 걷다’ 등의 소제목에서 보이듯 숨은 그림 투성이인 당대의 문화 지도에서 지은이는 당대의 소설 사회사를 힘겹게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세책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주제로 이웃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의 세책 이야기까지 다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등장한 소설 문학이 독자를 만나는 형식은 나라와 지역을 넘는 보편적 문화였던 셈이다.
세책업은 대중의 취향 변화와 인쇄술의 발달 등으로 20세기 초까지 성행하다가 쇠퇴했다. 그러나 세책본을 매개로 한 독자들과 세책업소의 만남은 국문 소설의 저변을 넓히며 소설을 시대적 문화상품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물론 값싼 방각본 소설을 공급하여 하층민들의 독서열을 채워주었던 방각업소도 빼놓을 수 없다.
지은이는 이 세책본과 방각본 고소설 덕분에 우리 소설사가 ‘다면적이고 역동적인 자취와 면모를 보이며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아울러 세책 문화를 알아가는 작업이 ‘우리가 잊고 방기해 왔던 소중한 삶의 지혜와 유산들, 이를테면 선인들의 독서생활 문화를 복원해내는 일’이라는 저자의 결론 앞에서 독자들은 머리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의 베스트셀러, 2007년 10월, 프로네시스, 9000원
조선의 베스트셀러 - 조선 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문학 이야기
이민희 지음,
프로네시스(웅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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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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