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옆 '야단법석'이곳이 절 여행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입니다. 벤치에 기대 앉아 (돌 탁자에 발 올려둔 채로) 책 한 권 꺼내 읽기 좋은 자리입니다.
서부원
그뿐 아닙니다. 나무 그늘 아래 넓고 평평한 돌 탁자를 놓고 긴 벤치 네 개를 둘렀는데, 이름 하여 ‘야단법석(野壇法席)’입니다. 본디 이것은 ‘법당 바깥에 자리를 깔아두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의미이지만,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나 법력 높은 고승이 중생들을 앉혀놓고 설법을 베풀기에는 너무 비좁고, 그렇다고 장삼이사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이기에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저 무더운 여름에 차분히 앉아 더위를 식히거나, 늦가을 이맘때쯤 기대어 앉아 낙엽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책 한 권 읽을 만한 그런 곳입니다. 그러하니 굳이 의미로만 본다면 어색하지만 ‘애칭’ 삼아 부르기에는 정감어린 이름입니다.
화장실 주변에 가꿔놓은 소담한 차밭과 연지(蓮池)도 재미있는 풍경 중 하나입니다. 절 안의 너른 공간을 다 비워두고 왜 하필이면 화장실 옆에다 만들어 놓았을까 궁금할 따름입니다. 화장실이 지닌 ‘불결한’ 이미지를 해소하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화장실의 우리 몸-곧, 인분(人糞)-도, 이슬 머금은 찻잎도, 탐스러운 연꽃도 본디 다 같은 것이라고 본 것은 아닐는지. 불결한 마음과 눈을 통해서 보니 그러할 뿐, 그저 우리 삶 속에서 인연이 돼 만나는 ‘것’들로 무덤덤하게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수 해 전 티베트를 여행하다가 야크의 둥글고 딱딱한 배설물이 티베트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야크의 배설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만지는 그들에게 불결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삶 자체를 모독하는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화장실을 나오며 더러워졌다며 물로 손을 씻어낼 일이 아니라, 마음과 눈에 끼어 있는 해묵은 편견의 때를 벗겨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화장실 주변을 서성거리며 깨닫게 된 (교훈이라면) 교훈입니다.
‘늦가을’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를 돌아, 흡사 위세 있는 어느 반가의 별서(別墅) 정원 같은 연못을 건너면 법당이 있는 안마당에 이릅니다. 고운 잔디가 깔린 안마당 둘레로 기와를 얹은 야트막한 담이 둘러쳐져 있어, 고을의 젊은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향교나 서원 같기도 합니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담벼락 너머로 다 들여다보이는 요사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입니다. 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입구에 엎드려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누렁이 한 마리가 이곳이 관광객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경건한 예불 공간인 법당(극락전) 바로 곁에 요사채를 둔 탓이라지만, 컹컹 짖는 개를 ‘불경하게도’ 법당 옆에 묶어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 짓게 만듭니다. 법당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한 부도 한 기와 창건자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을 모신 영각(影閣)이 있고, 그곳에서부터 이 절의 백미인 ‘산책로’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