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나루터.동작 나루터가 있던 곳에서 바라본 삼각산
이정근
유배행렬이 청파역을 지나 한강진에서 거룻배에 올랐다. 바람에 흔들리는 뱃전에서 바라보니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잘있거라 백악산아, 다시 보마 삼각산아."
이숙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의지를 불태웠다. 꼭 보리라 다짐했다. 동작 나루터에 도착한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태령에 올라서니 숨이 턱에 닿는다. 언덕 마루턱에서 땀을 식히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한양을 바라보며 예전에 임금과 사사로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신은 지나치게 상은(上恩)을 입었습니다. 우매한 것이 많아서 설령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성명을 보전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지 않으면 너의 말을 좇아 보전하여 주겠다'라고 말했던 임금의 말이 번뜩 생각났다.
"이보시오, 도사! 그전에 주상께서 보전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계셨음을 늘 잊지 않고 있었는데 허무하오."
혼잣말처럼 넋두리를 풀어놨다. 휴식을 끝낸 일행은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유배 행렬이 과천을 지나 금령역(金嶺驛)을 통과할 무렵이었다.
"죄인의 행렬은 멈추시오."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마리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의 행장으로 보아 역마가 아니라 의금부의 준마였다. 이숙번은 가슴이 뛰었다. 주상전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돌아오라는 말을 보내셨다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인 일이오?"
"유배 행렬을 돌리라는 어명입니다."
죄인 호송을 책임맡은 의금부 도사와 전령의 얘기다. 이숙번은 끼어들 틈새가 없다. 함양으로 향하던 유배행렬이 방향을 바꿔 한양으로 향했다. 따라만 가야하는 이숙번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답답했다.
"무슨 연유인지 심히 궁금하오."
이숙번은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물이라도 시원하게 한 바가지 마셨으면 좋겠지만 그럴 짬이 없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스로 물었다.
"죄인을 잡아 오라는 어명입니다."
전령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간 이숙번은 현기증을 느꼈다.
"같은 말이라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유배 가는 사람을 잡아 오라니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기대에 부풀었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단 말인가? 유배지로 향하는 죄인을 잡아 오라니 이게 무슨 곡절인가? 용서해주기 위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죄를 더 주기 위하여 잡아 오라했단 말인가?"
이숙번은 유배지로 향하던 죄인을 불러 세워 참형에 처했던 이무 사건을 상기하며 등골이 오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