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 맨 우측이 육군대위 차지철. <해방60년사> 전시회에서 촬영했습니다.
이정근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교만과 위세를 떨치던 차지철은 10·26 당시 경호실장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피신했다.
태종과 박정희는 닮은 부분이 많다. 권력쟁취 수단이 무력이었다는 점이 같고 집권기간 18년이 같다. 목숨을 걸고 거사에 동참한 혁명동지를 내친 것도 비슷하다. 때문에 박정희 시대에는 학계는 물론 언론에서도 태종을 거론 하는 것 자체가 금기 사항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중장을 최고회의 의장으로 모시고 박창암 대령을 혁명검찰부장으로 중용했으나 곧바로 반혁명 혐의로 숙청했다. 최고회의부의장 이주일과 해병대가 한강을 건너는데 역할을 한 해병소장 김동하도 숙청되었으나 정일권은 장수했다. 하륜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혁검'이라 약칭했던 혁명검찰부는 산천초목도 떨게 했던 무서운 기구였다. 헌법을 유린한 쿠데타 상황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회악 일소라는 미명아래 깡패를 소탕하는 것은 물론 4·19당시 내무부장관이던 홍진기(현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부친)를 부정선거 혐의로 잡아들이고 이병철(현 삼성 이건희회장 부친)을 부정축재 혐의로 불러들였다.
뿐만 아니라 사학자 이선근도 잡아들였다. '고구려도 망했고 신라도 패망했는데 왜 한국사가 신라 중심으로 되어야 했나?' 45년 전 이선근에 대한 혁검의 심문이지만 오늘날까지 여운으로 남는다. 그 후 JP를 국외로 추방하고 김형욱은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JP가 외유 떠나면서 김포공항에서 남긴 말.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영원히 권좌에 있을 것 같았던 박정희는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했다. 박정희는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내려왔고 태종은 자의에 의해 내려왔다. 같은 길이라도 내려오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이숙번이 떠나자 대규모 검거선풍이 불었다하교를 받아든 이숙번은 다시 한양을 떠나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숙번의 정치생명이 끝난 것을 확인한 조정에서는 이숙번 파당의 숙청에 들어갔다. 좌의정 박은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유사눌이 지신사(知申事)로 있을 때 이숙번의 무리에 비부(比附)하여 황단유의 노비를 빼앗았으니 유사눌을 불러 임금을 기망한 사유를 묻게 하소서."
"이숙번과 유사눌이 전성(全盛)하였을 때에는 어찌하여 이 말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진노한 태종은 노비변정도감 당시 형조참의(刑曹參議) 윤임, 좌랑(佐郞) 송명산과 박융 그리고 지금의 참의(參議) 오식, 정랑(正郞) 송기·허항, 좌랑(佐郞) 양수와 김연지, 사헌집의(司憲執義) 이감, 지평(持平) 홍도와 진중성, 사간(司諫) 최순, 정언(正言) 안지·정지담 등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병조판서 윤향과 조말생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또 의금부에 명하여, 당시 형조 정랑이었던 지수천군사(知隨川郡事) 김희와 나주교수관(羅州敎授官) 이초, 그리고 형조 장령이었던 지진산군사(知珍山郡事) 유선, 전 헌납(獻納) 정곤(鄭坤)을 잡아 오게 하였다. 대규모 검거 선풍이다. 이숙번 세력의 초토화 작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박신과 정역, 위관(委官) 윤향·서선·홍여방·이명덕·한승안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영의정 유정현, 예조판서 변계량, 동부대언 하연, 병조참의 우균에게 명하여 잡치(雜治)하게 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진무(鎭撫) 이척, 지사(知事) 정종성, 도사(都事) 김안경·양질 등을 하옥하고 이조정랑 우승범, 호조정랑 서적, 공조정랑 박신생도 잡치하는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다. 오늘날의 지검 사건에 중수부가 투입된 것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