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각. 한쪽만 벽면이 있고 3면은 모두 문으로 되어 있어서, 문만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김종성
그런데 이 집안의 기구한 삶은 양산보 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차남인 양자징의 아들 양천경이 신묘사화(1591년) 때에 장살을 당한 것도 모자라서, 이 집안사람 4명이 얼마 후 정유재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이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전라도가 조선군 보급지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자국이 전쟁에서 실패했다는 판단에 따라, 일본은 정유재란 때에는 수륙 양면에 걸쳐 전라도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 와중에 양천경의 부인과 2남 1녀(3남 1녀이지만, 장남은 피랍 모면)가 1597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대에 붙잡히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을 생포하면 목·코·귀만 잘라 전리품으로 갖고 가거나, 아니면 부산에서 일본 상인에게 팔아넘기거나 혹은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기술자나 관료 집안 출신들이었다. 양산보의 손자며느리와 증손자들도 그런 이유에서 끌려간 것이다.
1985년에 삼영사가 펴낸 <변태섭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에 실린 이원순의 '임진·정유재란시의 조선부로노예문제-왜란 성격 일모'라는 논문에 의하면, 1592~1599년 기간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납치자는 대략 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대대로 사화의 피해를 입은 이 집안에서 가족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가는 비극까지 맞이했으니, 저승에 있는 양산보가 이를 보았다면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쇄원도 이때에 불타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쇄원이 완전히 중건된 것은 양산보의 5대손 때에 가서의 일이다.
1597년에 일본으로 끌려간 양산보의 후손들은 제2차 회답겸쇄환사(통신사의 이전 명칭)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20년 만인 1617년(광해 9년) 10월 18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와키자카가 송환을 거부하는 통에, 조선 외교관들이 막부에까지 로비를 벌여 겨우겨우 송환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송환과정에 관한 자세한 기술은 호남사학회가 2006년에 펴낸 <역사학연구> 제28집에 실린 김덕진 광주교육대 교수의 논문 ‘왜란과 소쇄원 사람들 그리고 소쇄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이라는 해양세력이 동아시아 세계에 명함을 내민 16세기 후반에 소쇄원을 거점으로 한 양산보의 후예들은 격동의 와중에 일본에까지 끌려갔다가 어렵사리 귀국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