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3형제의 연극 사랑 이야기

[인터뷰] 연극이라면 죽고 못사는 춘천의 황운기·운학·운용씨

등록 2007.08.30 18:07수정 2007.08.3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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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막내 운용, 운학, 운기씨.
왼쪽부터 막내 운용, 운학, 운기씨.송기영
강원도 춘천에 '연극'이라면 죽고 못 사는 삼형제가 있다. 황운기(雲基)·운학(雲鶴)·운용(雲聳)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한 집안의 삼형제가 모두 연극의 길을 걷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사연들을 찾아가 들어보았다.

1989년, 어머니가 갑작스레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형 운기씨가 16살 되던 해였다. 하지만,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마저 그 해 겨울, 심장마비로 어머니를 따라갔다.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버린 삼형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둘째와 막내를 보며 운기씨는 유서를 썼다. 언제 날을 택할까만 고민하며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운기씨에게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연극 표 한 장을 내밀었다.

"힘든 것 안다. 기분전환도 할 겸 한번 보고 오거라."

연극이라고는 성탄절에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본 게 전부였던 운기씨. '이 마당에 웬 연극?'이냐며 마지못해 보러 간 연극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자살할 마당에 웬 연극?

<우린 나발을 불었다>. 연극의 제목이다.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을 보며 온 몸이 전율했어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 같았어요."


연극이 끝났는데도 다리가 떨려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극장에 붙어 있는 연극 포스터 한 장을 떼서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 길이야."


교회에서 직접 대본을 써가며 연극을 시작했다. 그리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대로 된 연극무대에 도전했다. 직장을 다니며 극단을 알아보다 한 생활정보지에서 단원모집 공고를 보고 무작정 응모했다. 극단 굴레.

"제 친정 같은 곳이었지요.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수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간단한 오디션만 거치고 운기씨는 굴레의 단원이 되었다. 연출이 꿈이었지만 먼저 배우로 시작했다.

운기씨가 연극에 빠지자 동생들도 자연스럽게 연극을 접하게 되었다.

"현실에선 가난한데 배우가 되면 부자도 될 수 있고 높은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안 돼, 막내 운용씨도 극단 굴레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학교를 다니며 연극을 하는 것이 벅찼지만 며칠 밤을 새도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형제들은 끝을 알 수 없는 연극의 마력에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삼형제 연극에 빠지다

첫째 운기씨.
첫째 운기씨.송기영
1996년 극단 굴레가 일본 도야마 국제연극제에 초청을 받게 됐다. 단원이었던 큰형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첫 해외여행이라 들떠 있었다는 운기씨.

"연극 내용보다는 무대장치를 넋놓고 바라봤어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상상도 못하던 무대와 조명이었거든요."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회사와 극단을 오가며 틈틈이 일어공부도 시작했다. 돈을 아끼려고 무료강좌를 찾아다니다 일본어학과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무료로 개인교습을 받기도 하였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었다.

둘째가 해병대에서 제대한 98년 초, 드디어 운기씨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군인 티가 채 가시지도 않은 둘째에게 할머니와 막내를 맡겨가며.

"먹고 살기도 힘든데 갑자기 유학을 간다니 어리둥절했어요. 제대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먹고 살라고."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운기씨는 도일(渡日)하고 말았다. 둘째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축하드립니다. 합격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꿈은 아니었다. 맏형이 일본으로 유학갈 때쯤 막내 운용씨가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기초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 이론 공부도 탄탄히 해야지.'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대학은 나중에 가라. 반드시, 더 좋은 기회가 생길거야." 축하해줘도 모자랄 판에, 형들은 오히려 대학 포기를 종용했다.

등록금 200만원. 없는 살림에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라며 포기를 요구했지만 운용씨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이 어떻게 남도 아닌 나에게 이럴 수 있을까?'

맏형이 떠나자 막내는 방황의 길로 들어섰다. 공사장 인부부터 자장면 배달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일 속에 매일 밤을 술로 지새웠다. 결국, 형들과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갔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일본의 한 조그마한 극단에서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한 첫째 운기씨.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밤에는 연극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정말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냉정하게 떼고 온 가족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남몰래 고국의 보름달을 바라보며 눈물도 훔쳤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귀국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도모'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

극단 도모 식구들
극단 도모 식구들송기영
2년 동안 일본 극단생활을 하며 연극을 공부한 첫째가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꿈에 시동을 걸었다. "정말 하고 싶은 연극을 해보자"며 '굴레'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 4명을 모았다. 선배가 운영하던 사무실에 책상도 하나 빌려놓았다. 컴퓨터를 한 대 구입한 후, 타이틀이 거창한 연극 기획사를 열었다.

"이름은 뭘로 할까?"
"큰 일을 함께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도모'가 어떨까?"

그렇게, '도모'가 탄생했다. 2000년의 일이었다.

무게 있던 이름과 달리, '도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공연기획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기에 하는 일이라고는 공연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 전부였다.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지는 한겨울. 꽁꽁 언 손을 불어가며 춘천 전역에서 포스터를 붙이고 뿌렸다.

2만장을 붙이는 작업에 일손이 부족해 여자친구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렇게 고생해도 손에 쥐는 돈은 달랑 20만원 정도. 휴대폰 요금도 내지 못한 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늘어만 갔다.

포스터만 붙이기를 3년. 문득 어느 날, 오기가 생겼다. 서울의 한 극단이 춘천 공연을 위한 포스터 붙이기를 의뢰해오자 공연 기획을 한 번 맡겨 달라며 애걸복걸 매달렸다. 더 이상, 포스터만 붙이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떼쓰다시피 간청했기에 승낙을 얻어냈다. 하지만, 경험이 전무한 데다 아는 것도 전혀 없었다.

단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몸으로 때우기로 했다. 콘셉트를 생각하고 언론사를 방문할 시간에 거리로 나가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에 포스터를 붙이다 경비원에게 붙잡혀 쫓겨나기도 했고, 포스터로 벽을 도배하다시피 하다가 손가락이 부르트기도 했다.

틈만 나면, 춘천 명동과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알리고 또 알렸다. 그렇게 일하기를 한 달. 절반만 채워도 성공이라는 객석이 바글바글한 관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대성공이었다.

첫 작품의 성공을 계기로 '도모'는 춘천 유일의 공연기획사로 등장했다. 같은 해, 큰형 운기씨는 '춘천국제연극제'의 사무국장직까지 맡으며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사무실도 훨씬 널찍한 데로 옮기면서 사업은 번창해 나가기 시작했다.

막내의 고백 "나 연극하고 싶어"

막내 운용씨
막내 운용씨송기영
그렇게 첫째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 막내 운용씨는 군에서 제대한 후, 여전히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연극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러던 어느 날. 화창한 가을 날씨 속에 배달 트럭을 몰고 대관령을 넘어가다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한잠 자기 위해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히는 순간, 유난히도 파란 가을 하늘이 퍼뜩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시퍼런 물이 콸콸 쏟아질 것 같았던 형용할 수 없는 그 색.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난 연극배우인데, 난 연극을 해야 하는데…."

그 길로 회사를 때려치고 큰형을 찾아갔다.

"연극하고 싶어."

눈시울이 시큰해진 큰형.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자신을 믿고 연극을 쉽게 대할까봐 오히려 혹독하게 대했다. 주변에서도 기획사 대표인 동생인 운용씨를 부담스러워 했다. 그런 와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해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막내가 결국, 허드렛일에서부터 하겠다고 나선 것.

막내는 사무실·창고·화장실 청소는 물론, 건물 앞의 잡초 뽑기에 이르기까지, 귀찮고 더러운 일들을 묵묵히 찾아 다녔다. 그러자, 주변에서도 막내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런 부지런으로 이제는 어느새 '도모'의 어엿한 핵심 멤버가 된 운용씨. 게다가 연기 실력도 만만찮게 주연 배우도 꿰차기에 이르렀다. "저보다 잘하는 배우들이 너무 많다"고 너스레를 떠는 운용씨지만, 이미 연극계에서 꽤 알려진 이름으로 자랐다.

큰형 따라 연극을 좋아하게 되면서 조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둘째 운학씨.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조명담당 직원을 뽑으니 지원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첫째 형의 권유에 주저 없이 다니던 전기 회사를 관두고 지원서를 냈다.

"형 따라서 연극 무대도 함께 만들고. 조명도 설치했던 행복한 기억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어요."

첫째는 연출하고 둘째는 조명을 맡아 막내가 연기하는 무대

결국, 긴 세월 끝에 삼형제는 다시 무대 앞에 모여 섰다. 2003년의 일이었다.

지난 14일, 모처럼 삼형제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 달에 한두 번 밖에 함께 자리하지 못한다는 운기·운학·운용씨. 오랜만에 마련된 자리라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 놓느라 정신이 없다.

물론, 화제는 늘 연극 이야기. 그 가운데에서도 결코, 빼먹을 수 없는 레퍼토리가 있다. 첫째가 연출하는 연극에서 막내가 둘째의 조명을 맡으며 연기하는 무대. 그 날도 형제들은 어김없이 연극 이야기에 밤을 지새우다 자신들이 연출하는 연극을 꿈꾸며 행복한 잠자리에 들었다.
#연극 #삼형제 #도모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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