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악봉의 분화구 근처에 있는 진지동굴. 기록에 의하면 4.3 당시에 무장대는 일본군이 파 놓은 진지동굴에서 숨어지냈다고 한다.장태욱
전쟁 말기에 일제는 각 가정에 제기그릇, 놋그릇 등 쇠붙이는 모두 수탈해갔으니, 가정마다 숟가락이 없어서 나무젓가락을 이용해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석유가 부족해져서 송진 기름을 빼 오라고 할당하니, 집집마다 소나무 밭을 다니면서 송진을 빼서 공출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은 되었지만 그 기쁨은 잠시였고, 금악마을도 4·3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갔다.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제주도민은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45년 9월 10일 도민은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9월 15일에는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그리고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미군은 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군과 민간인의 본국 귀환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미군은 친일분자를 축으로 권력기구를 구축하고, 그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통치하려 하였지만 미군정이 구축한 기구들이 당시의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46년이 되자 미군정은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 광복청년회 (후에 대동청년단으로 개편) 등의 우익단체 결성을 적극 지원 혹은 독려하였고, 본토에서 군과 경찰 병력을 보강하며 제주도의 좌익계를 압박하였다.
그러던 와중 1948년 3월 1일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은 오현중학교 교정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진행한 후 관덕정으로 시가행진을 했고, 그 와중에 미군정 경찰이 시위대에 총을 발사해 민간인 4명이 죽는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3·1절 시위사건 배후자 검거과정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을 구금하고 이중 3명을 고문 치사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의 좌익은 '제주도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인원 4만852명이 참가한 관공서 총파업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전도의 행정기능이 마비되자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좌익이라 의심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는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검거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좌익 지도자들과 수많은 도민이 산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