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막막할 때면 문득 찾아가고 싶은 곳

어린 날의 추억이 서린 광주 무등산 원효사

등록 2007.08.13 11:53수정 2007.08.1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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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부근에서 바라본 무등산.
일주문 부근에서 바라본 무등산.안병기
광주 무등산 원효사로 간다. 내 어린 날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나 어렸을 적 우리나라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었다. 고향 근처에서 숲이 우거진 산이라곤 무등산 하나밖에 없었다.

무등산을 젖혀두면 딱히 떠오르는 소풍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출발해 서림 마을을 지나 풍암정에서 쉰 다음 원효사에 오른다. 그리고 원효 계곡까지 가서 도시락을 까먹은 후 보물찾기와 노래자랑을 벌이다가 되돌아가는 것이 한결같은 소풍 순서였다.


내가 원효사를 찾아가는 것은 거의 40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무등산 상봉이나 증심사, 원효 계곡까지는 몇 차례 다녀갔었다. 그런데 정작 원효사만은 빼놓았던 것이다. 어쩌면 내 추억의 원형이 상실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원효사지구 주차장에서 차를 내린다. 원효사로 오르다가 일주문 근처에서 무등산을 올려다본다. 상봉엔 잔뜩 구름이 끼어 있다. 마치 너같이 무심한 놈에겐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투다. 원효 계곡 쪽 산자락은 녹음이 짙푸르다. 그리움은 세월이라는 거름을 먹고 자라는 유기질이다.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아낙들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위락이란 여름날 원효 폭포에 가서 떨어지는 물을 맞거나 송강정 근처 쌍교 다리 께 모래사장에서 모래찜 하는 게 전부였다. 가난했지만 추호도 불행하다는 느낌은 품지 않았던 유년의 기억과 순수하고 정감 어렸던 시간에의 동경들이 나그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원효사로 가는 길.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사이좋게 어우러진 길이다.
원효사로 가는 길.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사이좋게 어우러진 길이다.안병기
원효국사 탑(좌)과 회운당 부도(우)가 있는 부도밭.
원효국사 탑(좌)과 회운당 부도(우)가 있는 부도밭.안병기
오전8시. 원효사로 가는 산길은 고즈넉하다. 넓게 확 뚫린 아스팔트 길이 연방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아스팔트 길은 추호도 헛눈을 파는 걸 용서치 않는 성질 강파른 길이다. 옛날 원효사로 올라가던 길은 단풍나무 가지를 헤치며 가야 했던 밴댕이 속보다 좁은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맘껏 해찰하며 올라가도 되는 너그러운 길이기도 했다. 왜 길은 넓을수록 성질이 옹졸할까. 조금도 참아주거나 기다려주지 못하니 말이다.

조금 올라가자 오른쪽에 '원효사 입구'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나온다. 그 옆에 그리 크지 않은 부도밭이 있다. 원담화상과 회운당의 부도, 원효 스님의 부도도 있다. 모두 조선시대 말에 조성된 것이다. 원효사의 개산조로 알려진 신라 승 원효의 부도를 이때에 이르러서야 세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 원효사의 살림이 그만큼 풍족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새삼스럽게 원효의 적통을 내세울 필요라도 있었다는 뜻일까. 조선시대 말이라면 아마도 십중팔구 이곳에는 대처승이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혹 절의 주지는 원효의 부도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원효 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는 회암루 조망


2층 누각인 회암루.
2층 누각인 회암루.안병기
회암루에서 바라본 무등산. 왼쪽 큰 봉우리가 의상봉이다.
회암루에서 바라본 무등산. 왼쪽 큰 봉우리가 의상봉이다.안병기

이윽고 원효사 입구에 도착한다. 내 오랜 그리움의 원천인 원효사는 제행무상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벌써 가슴이 콩당콩당 뛴다. 먼저 2층 누각 회암루가 나타나 제행무상을 설(說)한다. 회암루 아래를 통과해 계단에 올라서자 눈앞에 대웅전이 자태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생소하다. 이 생소함은 내 낡은 기억이 부린 조화인가, 새로 지은 건물들 탓인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신발을 벗고 성큼 회암루로 올라간다. 누각 안엔 보살 한 분이 명상에 잠겨 있다.

누마루 난간에 기대어 맞은편 의상봉을 바라다본다. 신록이 아름다운 봉우리다. 낡은 기억 하나가 두둥실 떠오른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저 봉우리 아래엔 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의 스님은 할아버지 생전에 가끔 우리집에서 묵어 가곤 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소풍 때 일부러 원효 계곡에서 그곳까지 가서 굴 안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 어린 내게 석굴 안에 집처럼 들어선 법당은 신비 그 자체였다.

누군가 이 회암루에 올라 저녁 비 내리는 의상봉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일컬어 '원효 팔경'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눈길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무등산 상봉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상봉에 머물던 구름이 어느새 중턱까지 내려와 있다.

대웅전.
대웅전.안병기
군데군데 깨진 채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옛 탑.
군데군데 깨진 채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옛 탑.안병기
대웅전 기단에서 바라본 무등산.
대웅전 기단에서 바라본 무등산.안병기

원효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효대사가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 하여 원효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원효사 풍경을 확정지은 것은 1980년대 주지였던 신법타 스님이라고 한다. 그때 대웅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을 중창한 모양이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자 닫집이 홀로 나뒹굴고 있다. 제대로 보관하든가 버리든가 하지 않고, 왜 이곳에 이렇게 방치해 두는 것일까.

단청이 벗겨진 고풍스런 옛 원효사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내게 원효사 전각들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경한 풍경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으로 어떻게 감히 이 절의 역사가 1300년이 넘는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물론 광주시 문화재로 지정된 만수사 범종과 동부도가 있다지만 치지 않는 범종이란 영혼을 상실한 인간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원효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금동불입상, 청동불두, 소조불두, 청동보살입상 등을 광주박물관이 아니라 이곳에 보관해선 안 되는 것일까.

절 마당에 서 있는 희멀건 한 5층 탑은 1300년 만고풍상을 겪은 원효사의 세월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다. 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성보각 오른쪽에서 깨어진 탑을 본다. 이것이 예전에 있었던 탑인 모양이다. 기단과 지붕돌이 깨진 모습일망정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 시대의 '원효' 고은 시인을 떠올리다

대웅전 기단 위에 서서 무등산을 다시 바라본다. 상봉과 서석대를 구름이 감싸고 있다. 참으로 신비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고은 시인이 쓴 자전소설 <나, 고은> 제2권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고은 시인은 1952년 19세의 나이에 전북 군산 동국사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일초라는 법명을 얻는다. 그러나 이듬해 그의 스승이자 중관학 권위자였던 혜초 스님의 갑작스런 환속을 목격하고 나서 그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행각승으로 지내던 일초는 마침내 대처승이 주지로 있던 원효사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증심사를 거쳐 무등산 비탈을 올라가 산의 내부에 자리잡은 깊은 산중의 원효사에 당도했다. 주지는 대처승이었으나 나의 행색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법철(法徹)이라는 청년을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그는 사내인데도 머리를 길러서 그 머릿단이 등허리를 덮고 수염도 앞가슴을 가리는 정도였다. 눈빛에 제법 힘이 들어 있는데 걸핏하면 으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이 사람이 하필 효봉스님으로부터 거사계(居士戒)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어서 나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의 형은 법달(法達)이라는 법명으로 통영 효봉스님 문하에서 정진중이라 했다. 하나는 비록 머리를 기르는 처사지만 형제가 한 스승의 제자가 된 것이었다. (하략)

-고은 자전소설 <나, 고은> 제2권, 140쪽(민음사, 1993)


그는 이 법철이라는 괴짜 청년과 <무자> 화두와 <똥막대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수행에 정진한다. 때로는 눈 내린 서석대에 오르기도 하고 함께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는 등 온갖 기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어쩌면 여기 머물던 일초 스님 아니 고은 시인은 1300여 년 전 원효 스님의 환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개산조당(좌)과 명부전(우).
개산조당(좌)과 명부전(우).안병기
대웅전 아래로 내려와 절 마당 왼쪽에 있는 개산조당 앞에 선다. 개산조당은 원효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전각이다.

이쯤이 내가 소풍 왔을 적에 마시곤 하던 석간수가 있었던 자리인 것 같아 둘러보니 아닌 게 아니라 개산조당 뒤 암반에 물이 흐르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린 내게도 산 위에서 대나무 대롱을 타고 내려와 석조에 고인 물을 조롱박으로 떠먹는 원효사의 물맛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지금 원효사의 샘은 대웅전 축대 아래에 있다. 물맛이 좋다고 소문나 찾는 사람이 많아져서 샘을 크게 확장해버렸다는 말을 아는 이에게서 들었다. 사람들은 왜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더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미혈(米穴) 전설이 얘기하는 간단한 교훈마저 가슴으로 체득하지 못하는 걸까. 혹 우리 시대가 섬기는 부처는 대형화, 물량화라는 허상이 아닐는지?

내 영혼의 본향(本鄕)은 무등등(無等等)한 세상

옛 출입로 쪽에 자리한 범종각.
옛 출입로 쪽에 자리한 범종각.안병기
옛날 출입로 쪽에 자리한 범종각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저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은 천상을 훨훨 날 수 있을까. 아뿔싸,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넣지 못하였구나. 언젠가 저녁 무렵 원효사에 다시 와서 무등산 골짜기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싶다. 어찌 범종 소리가 한갓 지옥 중생만을 깨우치겠는가.

원효사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섭섭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무등산을 올려다본다. 봉우리들의 높낮이가 크게 차이지지 않는 무등산은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봉분 같다.

무등산의 무등은 불교의 무유등등(撫有等等), 즉 부처님은 모든 중생과 같지 않다는데서 나온 말이라고도 하고 만인 평등을 뜻하는 무등등(無等等)에서 유래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산 이름이 생긴 유래에 비추어 생각하면 무등산의 정상을 일컬어 천왕봉이라 부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나 어렸을 적엔 그냥 상봉이라만 불렀다.

내 고향과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리 집 마당에서면 굳이 눈을 돌리지 않더라도 무등산 상봉이 바라다보였다. 점심때, 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면 태양이 무등산 상봉에 떠 있곤 했다. 말하자면 고향이란 말과 무등산이란 말은 이음동의어였다.

스무 살 무렵, 고향이 광주호 아래 수몰되었으며 내 삶도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금껏 그 어느 곳에도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민적 삶을 살면서 쉽사리 고향 근처에 이르지 못했다. 때때로 귀향이나 고향 근처의 귀농을 꿈꾸는 순간이 있기도 했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영 고향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이 나를 지배하던 때도 없지 않았다.

40년 만에 찾아온 원효사 마당에 서서 생각한다. 원효사를 정말 원효 스님이 처음 지었을까를. 으뜸 원, 새벽 효, 말 그대로 평등한 세상을 여는 첫 새벽이 오는 땅이라 생각할 수는 없을까. 무등등(無等等)한 세상을 꿈꾸는 내 정신적 본향을 이곳에 두고 싶다. 이제부터는 육신의 고향보다 더 자주 찾아오리라.

원효사를 나선다. 다음 행선지는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아름다운 원효 계곡 아래 풍암정이 될 것이다. 행여 풍암정이 한여름에 뭐하러 찾아왔느냐고 타박하진 않을까.

덧붙이는 글 | 7월 26일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7월 26일에 다녀왔습니다.
#원효사 #무등산 #상봉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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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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