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까투리에게도 모정(母情)이 있는데

달내일기(109)-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

등록 2007.07.07 13:52수정 2007.07.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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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 즐겁지 않은 이 있을까. 집에 가려면 직장에서 차를 몰고 양남면사무소까지 25분쯤 되는 거리를 주로 바다를 끼고 달린다. 바다의 풍광을 바라보며 달리는 이 길이 즐겁지만 면사무소에서 집까지 오는 십여 분의 길이 더 즐겁다.


이 길은 늘 달리면서도 또 달리고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이다. 양쪽으로 누운 제법 널찍한 논들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평지길 8분, 오르막 산길 4분쯤에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이 길은 참으로 많은 걸 보여주고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혹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생겼다 하더라도 여기쯤 오면 거의 다 풀린다. 동해 바다의 광활함과 웅장함이 내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일들이 얼마나 사소한지를 깨닫게 해 주고, 산과 들을 가로지르며 달릴 때 보이는 주변 자연물들의 정겨운 삶이 '함께 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어제(7/6) 미뤄왔던 일들을 다 처리하고 퇴근하는 터라 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오르는데, 저 멀리 오른쪽 길섶에 까투리 한 마리가 엉거주춤 서 있는 게 보였다. 첫눈에도 도로를 건너가려는 것임을 짐작케 하는 그런 자세였다.

이 길을 가다 보면 들짐승과 날짐승을 가끔씩 만난다. 다람쥐, 산토끼, 노루, 고라니, 너구리 ….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게 꿩일 게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만나다보니 어느 지점에 가면 나타날 때가 됐지 하며 슬며시 브레이크에 발을 얹는데, 오늘도 바로 그랬다.

혼자 길섶에서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미까투리
혼자 길섶에서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미까투리김태현
이제 잠시 후면 녀석이 지나갈 것이고,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녀석들은 도로 위를 날아 뛰어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잽싼 걸음으로 지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움직이려 하지 않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빵 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그러자 이쪽을 한 번 보는가 하더니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거였다. 그래서 출발하려고 가속기를 밟으려는데 … 아 그만 올렸던 발을 내려야 했다. 꼬마들이, 새끼들이, 꺼병이들이 줄이어 나오는 게 아닌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모두 여덟 마리였다. 어릴 때 예쁘지 않은 동물이 있으랴마는 마치 갓 태어나 첫걸음마를 떼는 병아리들처럼 한 줄로 늘어서서 나란히 걸어가는 꺼병이(꿩의 새끼)들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건너편을 보니 어미까투리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미는 새끼들을 데리고 차가 오지 않을 때를 골라 도로를 건너가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내 차가 왔고. 그냥 지나쳐가기를 바랐는데 섰고. 어미의 뒤에는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도로를 건널까 말까 판단하기 어려웠을 때 클랙슨이 울렸고. 어쩔 수 없이 날아야 했지만 새끼들이 걱정돼 바로 도로 건너편에서 마음 졸이며 이쪽을 바라보았으리라.


꺼병이들이 길 건너오기를 마음 졸이며 바라보는 어미까투리
꺼병이들이 길 건너오기를 마음 졸이며 바라보는 어미까투리김태현
순간적으로 비상스위치를 눌리면서 뒷거울을 보았다.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이들이 무사히 지나갈 때까지 맞은편에서 차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오르막길은 직선도로라 뒤에서 앞을 볼 수 있지만 반대쪽 내리막길은 바로 굽이길이라 앞을 볼 수 없으니 대부분의 운전자라면 브레이크 밟기보다는 그냥 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원래 차 통행이 적은 덕인지 기도의 덕이었는지, 다행히 꺼병이들이 무사히 건너자마자 트럭 한 대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맞은편을 보니 이미 길섶으로 다 들어가선지 보이지 않았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네 살짜리 남자 아이가 한 달 동안 버려져 썩어가는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이의 사인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어머니가 자물쇠를 채운 채 아이 혼자만 두고 나갔기에 영양실조 때문일 거라는 진행자의 말을 들으면서 문득 오는 길에 보았던 어미까투리의 모성이 떠올랐다.

하찮은, 정말 하찮은 미물이지만 제 새끼가 혹 위험에 처할까 안절부절못하며 길만 주시하던 그 간절한 눈을 떠올리자 우리 인간이 그 하찮은 미물에게조차 못 미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그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덧붙이는 글 | 그림은 현대청운중학교 김태현 선생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어제 사진기가 없어서 찍지를 못해 그 상황을 얘기해줬더니 그려준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그림은 현대청운중학교 김태현 선생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어제 사진기가 없어서 찍지를 못해 그 상황을 얘기해줬더니 그려준 것입니다.
#까투리 #꺼병이 #모정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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