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타라마 대량학살 추모 기념관 앞의 팻말김성호
오카피 호텔에 짐을 푼 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지난 1994년의 대학살 현장으로 달려갔다. 르완다에는 대표적인 대학살 추모기념관이 세 군데 있다. 지난 2004년 새로 지은 키갈리 주변의 기소지(Gisozi)라는 지역에 있는 키갈리 기념관과 키갈리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은타라마(Ntarama) 기념관, 니아마타(Nyamata) 기념관 등이다.
나는 지난 94년 대학살 이후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은타라마 기념관을 찾았다. 당시의 현장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키갈리에서 은타라마까지 가는 도로는 시아니카에서 수도 키갈리로 오는 포장도로와는 달리 비포장도로의 흙길이었다. 도로를 포장하기 위해 트럭들이 흙을 실어 나르고 불도저가 도로를 다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 은타라마 기념관이 나타났다. 시골마을의 작은 교회가 바로 대학살의 현장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성당에서 수천 명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옛날 가톨릭 성당이었던 교회 건물 입구에는 어린이 예닐곱 명이 앉아서 놀다가 외국 여행객이 들어서자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20여 년 전의 참사를 알 리가 없다. 가끔 찾아오는 외국 여행객이 신기할 따름이다.
성당 설교 연단 위에는 해골과 나무십자가가...
기념관 입구 작은 사무실에 있던 젊은 여직원이 나와 홀로 온 나를 안내했다. 분홍색 띠로 된 줄이 기념관 입구를 둘러치고 있었다. 아마도 추모의 상징인 것 같았다. 붉은 벽돌로 된 교회 안에 들어서자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수많은 해골들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부가 설교를 하던 연단 위에는 해골과 나무 십자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성당 벽으로는 나무 선반 위에 해골을 가지런히 모아 놓고 있었다. 해골 옆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몇 다발의 꽃묶음이 놓여 있었다. 꽃들이 말라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것 같다.
두개골 중에는 날카로운 칼로 잘리거나 깨어진 해골도 많이 띄었다. 중남미 원주민들이 벌채에 쓰는 칼인 마세테(Machete)라는 중국산 칼로 무참히 살해했다는 것을 두개골은 말해주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작은 두개골도 있는데, 그 당시 죽은 어린이의 것이다. 당시 다수족인 후투족 민병대는 여자나 어린이 할 것 없이 소수족인 투치족을 살해했다. 안내를 맡은 여직원은 "이 교회에서 살해된 사람만 모두 5000여 명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성당 뒤편 건물은 더욱 참혹한 현장을 증언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인 방화의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골들이 마치 동물의 뼈를 모아놓은 듯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물통과 바구니, 접시 등 식기들도 그대로 있었고 옷가지와 가방, 신발과 검은 양말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죽었는지가 궁금했다.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 다 교회에서 미사를 보다 죽은 사람들인가?"
"아니다. 후투족에 쫓겨서 교회로 도망 왔다가 몰살당한 주민들이다."
접시 등 식기는 투치족 주민들이 후투족에 쫓겨 그릇만을 들고 교회로 황급히 몰려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생명의 피난처를 갈구했던 교회도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시의 아비규환과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 내 귀를 때린다. 설교 연단에 놓여 있는 나무 십자가와 해골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종교도 구원하지 못한 현대 인류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