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이 누에를 말에 싣지 않은 까닭

등록 2007.06.14 16:01수정 2007.06.14 16:01
0
원고료로 응원
'비단 장사 왕 서방'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비단 직물업이 성행했다. 특히 명나라·청나라 시대에는 양자강을 낀 강남 지방에서 이 산업이 특히 발달했다.

한동안 중국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 강남의 비단 직물업에서 자본주의의 씨앗을 찾기도 하였다. 서양 자본주의가 중국을 침략하기 이전에 중국에서는 이미 자본주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영향이 없었더라도 중국은 자체적으로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명·청 시대 강남 지방에서 비단 직물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호주·소주·항주·성택진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호주 같은 곳에서는 비단 직물업과 연계되어 누에치기도 함께 발달하였다. 이런 데서는 잠월인 4월경이 되면 누에치기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한다.

명나라 때의 저명한 인문지리학자인 왕사성이 지은 <광지역>이란 책은 호주 지방에 관한 기술에서, "잠월에는 부부가 침대도 함께 쓰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모두 다 밤을 새워 가면서 누에를 쳤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밤을 새워 가며 누에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왕사성의 <광지역>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발견된다. 이 책의 권4 '강남제성'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누에고치를 운반하는 데에) 강남에서는 배를 이용하고, 말을 이용하지 않았다. 말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인근 지역의 친지에게 말을 맡겨두었다. 옛 사람의 말에 '본래 누에는 말의 정기(精)인지라, 저것(말)이 성하면 이것(누에)이 쇠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누에가 말의 정기'라는 표현은 '누에는 말의 엑기스'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말이 성하게 되면 누에가 쇠할 수밖에 없다는 이런 속설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에고치를 파는 입장에서는 누에를 말에 실어서 내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누에를 말의 정기로 생각한 이유는 일단 '마두낭 전설'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은 여인에 대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백마가 여자의 몸을 휘감은 채 죽어서 누에가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강남 사람들이 누에고치를 말에 싣지 않고 배에 실은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남 지방에는 양자강을 포함하여 태호 같은 호수나 대운하 등의 수로가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통한 육상교통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강남 사람들은 얼마든지 상품을 운반할 수 있었다. 만약 상품 운송에 말이 꼭 필요했다면, 강남 사람들은 마두낭 전설을 어떻게든 축소 해석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에고치를 말에 실으면 안 된다'는 속설은 어쩌면 당시 수상 교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농간'에 의해 더욱 더 확산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마두낭 전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한 백마가 죽어서 누에가 되었다'는 고대 중국의 전설은 '누에는 말의 정기'라는 관념으로 연결되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누에고치를 말에 실으면 안 된다'는 또 다른 속설을 낳게 되었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의 관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하여, 나중에는 객관적 사실을 일정 정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 4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5. 5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