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더닝 미국 전 < CBS > 기자김철관
"한국 민주화 투쟁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최루탄이 생각난다. 군사정부는 점점 강도 높은 최루탄을 사용해 사람들을 최루가스에 몸살을 앓게 했다. 그러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주최로 '외신기자가 본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미나에서 발제를 한 브루스 더닝 미국 전 CBS 기자의 발언이다.
당시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한국에 외신기자를 상주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할 때 급파해 취재를 했다고 밝힌 더닝 기자는 "외신에 근무한 한국기자들의 공헌이 컸다"며 "한국 기자들은 정부를 규탄하는 기사를 써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문제로 중앙정보부의 언론인 탄압이 극심했다"며 "언론기관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정부에 충성하라는 경고와 반정부 취재활동을 한다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유일하게 반정부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면 교회와 성당이었다"며 "명동성당 시위에서 중년의 남자와 여성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한국 취재 기간 중 광주민주항쟁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취재기간에 비디오 카메라로 사용해 취재를 했는데 계엄령이 발동되자 위성으로 보내야 하는 테이프는 모두를 한국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며 "당시 일본으로 가 위성으로 뉴스를 보내야 했는데, 한국 정부의 승인 마크가 없는 것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숨진 박정희 전 대통령 광복기념사도 도쿄 주재 외신기자로 참석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촬영했으나 정부가 촬영 대상을 입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강당을 재빨리 나와 공항으로 향했다"며 "다행히 한국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이어 "암살시도 후 수사가 진행됐으나 의문점과 의혹이 증폭됐다"며 "최근에서야 박정희 대통령 암살시도에 재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