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열린 '홉스봄 교수 초청 학술강연회'에서 강의하는 홉스봄.한길사
1987년 5월 12일 화요일 오후 5시 영국의 세계적인 사회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 )이 안암동에 있는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참으로 귀한 손님이었다. 이런 석학을 모실 수 있다니 출판사·출판인으로서 대단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정현백·박지향 교수가 안내했다. 나는 홉스봄에게 한국사회에서 당시 힘차게 전개되고 있는 사회운동과 출판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책과 권위주의적 권력이 갈등하고 있는 양상에 대해서도 말했다. 홉스봄은 어떤 책들이 판금되었는가를 저자 이름, 책 이름을 일일이 메모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진실을 추구하는 노학자의 정정한 모습이었다.
"한국사회는 지금 격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젊은이들의 운동과 정신은 일련의 젊은 출판인들이 펼치는 출판운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으로 '독서'하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젊은이들이 읽고 있는 책을 두려워하면서 그런 책들을 판매금지시키고 있지만, 독자들의 문제의식은 엄청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금서정책'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문제의식과 행동은 정부의 금서조치를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대석학은 나의 설명을 경청했다. 한국의 사회운동과 출판상황은 선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회사적 자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해 4월 28일 서울지검 공안2부는 '좌경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젊은 출판인 5명을 구속했다. 녹두출판사 김영호(27) 대표와 사계절출판사 김영종(32) 대표, 동녘출판사 이건복(33) 대표, 세계사 윤후덕(30) 대표, 거름 편집인 강경철(26)씨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괄호 속 나이는 1987년 당시 기준)
나의 방에서 나는 선생과 한 시간 정도 한국의 사회상황·출판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많은 책들이 판금되거나 강제 수거되며, 때로는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젊은 출판인들은 계속 책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런 대화를 홉스봄 선생과 나누던 그 80년대는 나에게 분명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의적의 사회사>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출판
홉스봄은 서울대 이인호 교수가 재직하던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초청하고 국제문화협회의 협찬을 받아 방한했다. 한길사와 서울대 서양사학과가 공동주최하는 '홉스봄 교수 초청 학술강연회'가 5월 9일 오후 동숭동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열렸다.
그날 '최초의 산업국가의 흥망 : 영국 1780~1980'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홉스봄은 당대의 석학답게 신념에 찬 목소리로 열강 했다. 영국의 상황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조건도 비교해가면서 강연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그의 이론과 사상은 열려 있었다.
한길사는 일찍이 홉스봄의 <의적의 사회사>(Bandits, 1969)를 1978년 11월에 펴냈다. 공업화되기 이전의 농업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비적 내지 의적현상을 분석하는 책이다. 역사 연구의 주류에서는 이제까지 별로 연구되지 않은 사회적 반항, 또는 민중의 원망(願望)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저술이다. 로빈 후드에서 양산박(梁山泊)의 산적들, 멕시코 초원의 혁명아 판초 비야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뒤안에서, 그러나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민중과 더불어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나이들의 이야기다.
한길사는 다시 '오늘의 사상신서' 제71권으로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 1975)를 1983년 12월에 펴냈다. 이어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colution, 1962)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74권으로 1984년 8월에 펴냈다. 그리고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 1987)를 '한길그레이트북스' 제14권으로 1998년 10월에 펴냈다.
이 세 권의 책은 홉스봄의 대표적인 저술로 이른바 '자본주의 역사 3부작'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14년까지의 '통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세계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홉스봄이 그려내는 역사풍경화는 하나의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