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이신 지구 안의 건물 장식 중 하나. 마침 비둘기가 성모 마리아의 손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이은비
한 5분여쯤 지도를 들여다봤던 저는 스스로 자신에게 말해봤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일단 올라가자!'
당시 저의 단순무식한 생각은 이랬습니다. 위에 성 니콜라스 성당(Catedral de San Nicolas)과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Iglesia del salvador, 구세교회)가 있으니, 무조건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꼭대기에 다다를 거야.
헌데 이 생각이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만나고 오겠네' 만큼이나 무식한 생각인 줄 당시에는 왜 몰랐을까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큰 길이 나오기는커녕, 점점 골목골목이 좁아지더니 마침내 사람 한 명조차 혼자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흰 골목들이 계속되는 겁니다.
100여 개가 넘는 골목에선 길을 잃습니다
온통 하얀 담과 건물들 사이에서,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아. 수세기에 걸쳐 세워지고, 또 그 위에 덧세워지고, 다시 또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와 증축하면서 중첩된 골목길을 제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일까요. 나중에 세어보니 알바이신은, 들어가는 골목만 100여 개가 넘더군요. 저는 지도로 127개까지 세보다가 포기했습니다.
'앗! 이 골목에서 좀도둑들이 양쪽으로 길을 막으면 꼼짝없이 도망도 못가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뭔지 바로 그 생각이 들면서 덜컥 겁이 나는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 물어보겠는데, 사람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담장 너머로, 혹은 미로 같은 골목 저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입니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찬란한 금빛으로 하얀 담벼락을 물들이며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돌연 가이드북과 몇몇 개의 여행 사이트에서 읽었던 경고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알바이신은 대낮에도 함부로 골목길을 들어가는 것은 삼가야 한다. 특히 해가 저문 뒤에는 강도나 소매치기, 부랑자들이 다니는 우범지대로 변모하니 해 저물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다."
해가 저문 뒤에는 우범지대! 저는 저물어가는 해를 원망스럽게 흘겨본 뒤, 총총거리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은 돌담길 옆에 벌렁 누워 오후의 햇살 속에서 오수를 즐기던 들개 한 마리가 잠깐 고개를 쳐들고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잠을 청합니다.
몇 골목을 가로질러, 조금 큰 길이 보이는 곳으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래 봤자 작은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만한 넓이의 길이지만, 이곳에 내려오니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도 두세 명이 보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관광객이나 뜨내기는 하나도 없고, 모두 알바이신에 사는 듯한 지역민들뿐. 그야말로 안달루시아 토박이 무어인들이 분명해 보이는, 스페인 사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한 거주민들뿐입니다.
터덜터덜 무작정 걷고 있는데, 먼지를 날리며 반대쪽에서 오던 트럭이 경적을 빵빵 울리며 지나갑니다. 트럭 안에 타고 있던 무어인 남정네들이 저를 쳐다보며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말들을 외쳐대며 씨익 웃습니다.
으악!! 무섭습니다. 아무도 없던 골목길은 조용하기라도 했지, 이곳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며 뭔지 모를 말로 수군거리는 남정네들을 보니 진정으로 저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기 시작합니다.
앗, 외지인이다! 생존본능을 발휘하라∼
바로 그 때, 길 건너편에서 제가 있는 방향의 골목으로 걸어 내려오는 키 큰 청년이 보였습니다. 검은 진에 검은 폴라티,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그 청년이 온통 하얀 알바이신 골목에서 툭 튀어나온 건 참으로 묘한 광경이었습니다. 푹 눌러쓴 검은 모자 밑으로 금갈색 구레나룻이 언뜻 내비쳤습니다.
'앗, 외지인이다!'라는 생각이 후두부를 강타하는 순간, 저는 생존본능을 발휘해 청년에게 "죄송한데, 영어할 줄 아세요(Excuse me,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멈춰 섭니다.
"Sure(물론)."
영어 통합니다! 만세! 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럼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동양인 여자의 기세가 너무나 절박했던지, 청년이 고개를 갸웃, 하더니 마치 치약광고에라도 나오는 사람처럼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또 "Sure"라고 말합니다.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거지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라고 물으니, 그 친구 왈 "그럼 한번 살펴봅시다"라며 자신의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착착 접은 지도를 꺼내듭니다. 아, 이 사람도 저와 같은 처지의 여행객이었군요. 갑자기 안심이 됩니다.
지도를 든 청년이 주변 골목들의 이름을 휙휙 둘러보더니, 지도를 짚어 가르쳐주는군요.
"아무래도 우린 산 아우구스틴 골목 근방에 있는 것 같군요. 앞으로 계속 올라가면 큰 길이 나와요. 큰길을 찾은 후 그대로 타고 올라가다 보면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가 나올 겁니다."
오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친구는 "괜찮아요. 여기 정말 라비린스(미로) 같아서 저도 몇 번이나 길을 잃을 뻔했으니까요"라고 말하고는 가던 길을 도로 갑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큰 길이 나온다는 말에 희망을 얻고 부쩍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금 출발. 얼마나 골목을 헤맸던지 발바닥이 욱신욱신 아파지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이 알려준 길로 올라가니 불과 수분만에 차가 다니는 2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도로 주변에는 멋지게 지어진 주택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아까 헤매던 어지러운 알바이신 안쪽과는 사뭇 다르군요. 아무래도 이곳은 중산층 거주구역인가 봅니다.
하지만 대로를 따라 올라가기를 10분여 만에 다시 또 복잡한 갈림길이 나왔고, 저는 더 이상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됐습니다. 간간이 알바이신 꼭대기로 가는 버스가 관광객을 가득 싣고는,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서 복잡한 골목들 사이로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