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동안 펼쳐지는 황량하고 너른 풍경. 구릉 뒤로 저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입니다.이은비
버스가 말라가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동안 창 밖에는 에스파냐의 너른 평원이 굴곡 없이 펼쳐집니다. 국토 어느 곳을 가든 산이 보이는 한국 땅에서 살던 제게, 이처럼 끝없이 탁 트여있는 구릉 지대는 굉장히 생소합니다.
간혹 구릉 너머로 허물어져 가는 돌탑이나 빈농가 따위가 보이면 마치 고야의 말년 그림에 나오는 풍경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스페인 내에서도 안달루시아 지방은 특히 경제력이 낮은 수준이라는데, 왠지 그러한 명암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수세기에 걸친 수탈로 인해 이제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이븐 바투다가 읊었던 풍요로움이 남아있지 않은 걸까요.
황량한 목초지 뒤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이름조차 '눈 덮인 지역'이라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지브롤터 해협 동쪽에 있는 고도 3400m의 산맥입니다. 바로 이 시에라 네바다 산맥 기슭, 다로강과 제닐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그라나다가 있습니다.
안달루시아 지방이야 어느 곳을 가든 레콘퀴스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전을 치른 곳입니다만, 그중에서도 그라나다는 그 정점에 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내 최후의 이슬람 왕국이 있었던 곳이니까요.
서고트 왕국이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으로 붕괴된 후, 1492년까지 약 800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의 영토였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손에 넣는 데는 불과 2년이 걸린 반면, 기독교인이 다시 이베리아를 손에 넣기까지는 수백 년의 세월이 걸린 셈입니다.
기독교도들이 국토회복이라고 주장하며 톨레도를 되찾은 것이 1085년,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를 탈환한 것이 1238년이었죠. 코르도바의 이슬람 왕족들이 그라나다로 피신해서 세운 나스리드 왕조(1231∼1492)를 쓰러뜨리고 아프리카 땅으로 내몬 것은 1492년에서야 가능했습니다.
가톨릭 부부 왕에 의해 그라나다가 지배되자 나스리드 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은 자신의 가련한 시민들을 보호해준다는 조건으로 금화 3만냥과 궁전을 바치고 항복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라나다의 주민들은 무자비한 학살과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피아를 가르는 무자비한 탄압은 무어인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그라나다에 남아있던 유대인들도 개종을 강요받는 등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라나다는, 그런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제게 그라나다는 그야말로 행운이 함께 한 도시였습니다. 1년 365일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시이지만 전혀 예약하지 않고도 곧바로 숙소나 교통편을 찾을 수 있었으며, 친절하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남부 스페인의 친절과 여유로움, 낙천적인 기질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지요.
그라나다는 행운이 함께 한 도시... "무차스 그라시아스!"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인포메이션 휘장이 걸려 있는 간이 테이블이 설치된 곳을 발견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다가가 "지도 주세요"라고 말하니, 간이 테이블에 기대 서 있던 밝은 갈색 머리 청년이 씩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인사합니다.
"올라(Hola)! 그라나다에 온 걸 환영해요! 지도는 여기. 그런데 숙소는 예약했나요?"
아! 여긴 영어가 통하는군요. 안심입니다. 저도 웃으며 말합니다.
"예약은 안 했는데, 오아시스 호스텔이라는 곳에서 묵고 싶어요. 어딘지 알려줄 수 있어요?"
어젯밤(2월 13일), 춥고 쓸쓸한 호텔방에서 혼자 잠들며 '그라나다로 가기만 해봐! 이따위 장소에서는 절대 안 잘꺼야!'라고 다짐했기에,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유랑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라나다의 오아시스 호스텔에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청년은 "오아시스 오스딸! 거기 진짜 유명한 곳이죠. 배낭여행객들은 정말 많이 가요!"라며 지도 하나를 집어들어 좌르륵 펼치더니 뒷면에 실려 있는 오아시스 호스텔 광고에 동그라미를 칩니다. "오아시스 오스딸 숙소 지도와 전화번호예요. 그리고…" 이번에는 지도를 다시 뒤집더니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합니다.
"버스터미널에서 이동할 때는 시내버스 타길 추천해요. 걸어가려면 진짜 멀거든요! 버스는 버스터미널 앞에 있는 시내버스 3번과 33번을 타세요. 까떼드랄 앞에서 내리면 돼요. 그리고 그랑비아 데 콜론 대로를 건너, 여기와 여기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오아시스 오스딸이 나오죠! 흠, 그런데, 숙소예약은 했어요?"
제가 고개를 젓자 청년이 다시 쾌활하게 말합니다.
"그 오스딸은 자리가 금방금방 차니까 전화하고 가는 편이 좋아요. 원한다면, 내가 지금 거기로 전화해줄까요?"
그러더니 청년은 재빨리 통화를 마치고 씩 웃습니다. "자, 이제 예약됐군요."
이럴 수가! 오자마자 한 방에 숙소 해결이야!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몇 번씩 거듭해서 "무차스 그라시아스!(정말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 '고맙습니다'라는 단어가 입에 착착 붙는군요.
쾌활한 인포메이션센터 청년과 손을 흔들며 버스터미널 2층으로 올라가니 출구가 보이고, 바로 앞에 버스들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카테드랄로 가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그 중 하나에 올라탑니다. 버스가 대로를 달리며 약 4분 정도 굽이굽이 돌았을 때 즈음, 버스를 탄 다른 배낭여행객들이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이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서 내리니 4차선 대로 바로 옆에 웬 대성당이 당당한 위용을 자리하며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라나다 카테드랄입니다. 카테드랄이 위치한 그란비아 데 콜론(Granvia de Colon) 거리는 도시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로지르는 주요대로인데, 이 대로 주변으로 초현대식 상점들과 고급 부띠끄, 일류 비즈니스호텔, 은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에 의하면, 대로 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대형 석조건물의 뒤편에는 수세기 전부터 형성된 좁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골목들이 미로처럼 뒤엉켜있습니다. 이런 점이 그라나다의 백미지요. 그랑비아를 기준으로 카테드랄을 오른편에 놓고 보았을 때, 그랑비아의 왼편에는 그야말로 한 빌딩 건너 하나씩 그 사이마다 좁은 골목길이 있는 형상입니다.
스페인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각오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