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한 일 발생! 메뉴가 온통 스페인어 뿐이라니!이은비
메뉴를 보니 하나같이 스페인어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천천히 메뉴를 훑어보니, 영어와 비슷한 스펠링으로 쓰여 있어 유추할 수 있는 단어들도 꽤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어렵게 초콜라테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라고 쓰여 있는 메뉴를 짚어, 그것을 매니저에게 보여줍니다.
유럽의 에스프레소라면 필시 엄청나게 쓰겠지만, 다른 걸 주문할 줄 모르니 도리가 없습니다. 매니저가 조용히 이마에 주름을 잡더니, "우노(Uno)?"라고 묻습니다. 오, '우노'라면 알아듣습니다. 하나라는 뜻이지요. "씨(Si: 네)"라고 대답합니다.
작은 접시에 초콜릿을 끼얹은 바삭한 크루아상 세 개가 담겨 나오고, 갓 뽑은 뜨뜻한 커피가 그 옆에 놓입니다. 주의 깊은 매니저는 내가 한 모금 마시는 걸 지켜보더니, 아무래도 여행객 입맛에는 맞지 않으리라 예상했던지 뭐라고 묻습니다.
"카페 콘 레체?"
제가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하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짧은 영어로 말합니다.
"커피 위드 밀크!"
와아, 좋고 말구요. 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니 그는 몸을 돌려 기계에서 증기를 쐐 스팀 밀크를 뽑아냅니다. 곧이어, 매니저가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온 스팀 밀크가 가득 담긴 주석냄비를 가져오더니,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커피에 우유를 부어 카페 콘 레체를 만들어 줍니다.
오, 향긋하고 풍부한 커피. 굉장합니다. 약 15시간 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음료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커피를 여느 바르(Bar)나 카페테리아에서 맛볼 수 있는 나라에 어째서 스타벅스 따위가 진출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만 하더군요. 하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스타벅스가 이탈리아를 위시한 유럽 여러 나라로 진출해서, 전통적으로 훌륭한 커피를 뽑아오던 수백 년 된 커피가게들을 문 닫게 하고 있다지요. 다국적 기업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저는 느긋한 기분으로 커피를 음미하며 마십니다.
배가 고프지만 조금씩 나이프로 초콜라테 크루아상을 잘라 먹다가(손에 묻히긴 싫었거든요), 슬쩍 곁눈질하던 금발의 주방장과 눈이 마주칩니다. 금방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올라!"라고 인사를 던지는 그녀에게도 함께 인사를 던지고는 주방을 훔쳐봅니다.
주방의 테이블 위에는 훈제 돼지넓적다리가 나무걸이에 길게 걸쳐져 있고, 그 옆에 긴 식칼이 놓여있습니다. 훈제 돼지넓적다리를 저 긴 칼로 조금씩 잘라내면 그대로 햄이 됩니다. 이 훈제 돼지넓적다리가 바로 스페인의 전통음식인 '하몽'이라는 건 훗날에서야 알았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 햄으로 온갖 요리를 다합니다. 굽거나 튀기거나 찌거나 혹은 생으로 빵 사이에 넣어서 먹지요.
어쨌든 시간이 벌써 오전 11시 28분. 슬슬 호텔 체크아웃을 한 뒤 그라나다로 떠날 시간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에서는 아무도 카운터로 가서 돈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갈 때 즈음 점원을 불러 계산서를 갖다 달라고 하면 점원이 조그만 접시에 계산서를 올려서 내갑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그 접시에 돈을 올려둔 뒤 카페를 나서더군요.
저도 한번 해봅니다. 매니저에게 다 먹었다는 시늉을 하니 매니저가 계산서가 담긴 접시를 내오며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아마도 맛있었느냐는 뜻 같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뒤, 접시 위에 동전을 딱 맞춰서 올려놓고는 "그라치아스(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카페를 나섭니다.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그라나다를 향하여...
호텔로 돌아가 하루 묵은 숙박요금을 지불하고, 다시 캐리어를 끌며 큰길로 나옵니다. 길에는 점점 관광객과 이 고장에 처음 오는 뜨내기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다들 이 고장 날씨에는 맞지 않는 긴소매 옷을 입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곧 저처럼 긴 외투 따위는 벗어던지게 되겠지요.
마리나 광장에서 버스터미널까지는 약 3.5유로 정도가 나옵니다. 이곳의 친절한 택시기사들은 캐리어를 들고 내릴 때마다 일일이 자신도 내려서 짐을 옮겨줍니다. 다시 덜덜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버스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니 난생처음 이용해보는 스페인의 버스터미널이 생소하기만 합니다.
전반적으로 우리네 지방 버스터미널과 비슷한 구조로 돼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매표소가 한 곳인 반면, 스페인 버스터미널에는 버스회사마다 창구가 개설돼있어서 복잡합니다. 더구나 각 버스회사마다 서비스하는 이동지역도 다 다릅니다. 보통은 창구 앞 유리창에 어느 지역으로 가는 버스표를 파는지 써붙여 놓습니다만…,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할 수 없이 눈에 보이는 아무 창구에나 가서 물어봅니다. "I wanna go to 그라나다!"라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짧은 영어로 외치니 안에 앉아있던 여성이 "여긴 없어요, 저 안으로 가 봐요"라고 말합니다. 대충 물어물어 가보니 가장 안쪽에 모여 있는 버스회사들이 그라나다로 가는군요.
오, 이제 분명히 보입니다. 그라나다라고 쓴 타임테이블이 창 앞에 붙어있습니다. 낮 12시 발 차가 하나 있군요. 이런. 불과 3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창구직원들은 느긋하기만 합니다. 차표를 사는 사람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도 옆 사람과 이야기할 건 다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느긋하게 차표를 끊어주고 있습니다.
제 차례에 급하게 "그라나다, 우노(그라나다, 한 장)!"라고 말하니 창구직원이 버스표를 출력해주며 역시 느긋하게 말합니다.
"너, 서두르지 않으면 버스가 출발 할꺼야. 12시 발이거든."
아, 그러면 빨리 출력해주던지! 스페인 사람들은 정말 너무 느긋합니다! 낚아채듯 버스표를 받아들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유리창에 달라붙어 묻습니다.
"근데 몇 번 플랫폼?"
"14번!"
저는 "그라치아스!"라고 외치며 툴툴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뛰어갑니다. 저 멀리, 제가 타고 갈 그라나다행 고속버스가 보이는군요. 간신히 도착해 캐리어를 짐칸에 밀어 넣고 버스에 오릅니다. 세이프!
버스가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출발합니다. 여행을 시작하기에 좋은 날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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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피카소의 고향, 안달루시아의 평화로운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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