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8회

등록 2007.05.18 08:26수정 2007.05.18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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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시신들의 모습은 충격을 넘어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평생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두 장로와 혈육과도 같았던 단혁의 시신은 옥청문의 두 눈에 피눈물을 쏟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의 판단착오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혈간의 죽음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지금 단혁과 두 장로의 시신에 나타난 사인(死因)은 단혁의 수하까지 합쳐 거의 열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바로 자신의 탓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확실히 동정오우 중 하나였던 자신의 형님, 혈간을 시해한다는 것은 단지 운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혈간의 시신에서 먼저 누군가에게 기습을 받은 것이 확실해 당시 형님의 몸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죽인 자들의 능력을 왜 과소평가했을까? 자책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시신에서는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 상대는 강하다!

자신과 옥청량, 그리고 옥기룡이 나서지 않는 한 상대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아니 자신들이 나선다 하더라도 그 두 놈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흩어놓았다고 하지만 두 장로와 단혁의 시신에는 분명한 흔적이 있었다. 구룡의 혈룡장을 익혔다. 또 한 놈은 보주의 심인검이다.

혈간의 시신에서 난 그대로의 흔적을 남겼다. 감히 자신들을 노릴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는 듯 했다. 수하 중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은 것은 어쩌면 전날 밤에 백호각에 침입했다가 한 놈이 옥기룡에게 당한 분풀이였을지도 몰랐다.

"……!"


옥청문의 두 눈에 물기가 촉촉이 배어들었다. 사내의 눈물이란 그 나이를 떠나서 어떠한 경우라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자식에게 가르쳤던 사람이다. 그의 눈물은 속울음을 떠나 더 이상 참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성급하게 나설 것 같던 옥기룡도 지금은 침중하게 얼굴을 굳힌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의 가슴은 의혹으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과연 전날 밤 이 백호각에 침입한 인물과 이 안에 늘어져 있는 철기문의 식솔들을 죽인 인물이 동일인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백호각에 침입했던 자 역시 쓸만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 많은 사람을 살상할 능력은 분명 없었다. 하지만 시신에는 분명 두 놈에 의한 짓임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에서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헌데 어찌하여 자신에게 당할 때는 혈룡장이나 심인검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죽인다… 반드시 두 놈은 내 손으로… 심장을 꺼내 씹을 것이다."

떨리는 듯한, 차라리 울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옥청문이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음성을 토하자 장내는 더욱 숙연해졌다. 저들과 함께 누워있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는 표정들이었다. 또한 옥청문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그 두 놈을 죽이겠다는 독심(毒心)을 굳히고 있었다.

"……!"

옥청량과 옥기룡의 시선이 옥청문을 향했다. 그것은 철기문의 집법당주(執法堂主) 임상웅(林祥雄)과 다른 두 당주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명령만 내린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움직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두 놈에 대해서는 추 태감과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두 놈을 잡아 죽인 후에 추 태감마저 죽일 것이다."

확실히 옥청문은 알고 있었다. 혈간의 시해는 분명 그 두 놈이 저질렀지만 뒤에서 명령을 내린 인물은 추태감이라는 사실을… 또한 이들의 죽음을 충동질 친 자가 바로 추 태감이라는 사실을… 이것은 분노로 인한 허언이 아니었다. 옥가 일족이 몰살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의 약속이었다.

여명(黎明)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벌어졌던 모든 일은 해가 고개를 내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죽은 자들은 죽은 대로, 산자는 또한 산자대로 다른 길을 걷는다. 또 다른 죽음을 예고하면서….

83

상만천은 어둠이 걷히기 전부터 의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할 일접(一蝶)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고, 자신이 머물던 방에 놀란 표정 그대로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그녀의 눈을 감겨주지 않은 것은 반드시 복수를 해 준 후에 감겨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편안히 눈을 감을 것 같았다.

사르르륵----

그가 입고 있는 금포(錦袍)는 황상(皇上)만이 입는다는 용포(龍袍)와 다름없었다. 다른 색깔이 전혀 섞이지 않고 금빛뿐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상민민이 세심하게 옷깃을 펴주고 있었다. 상교교 역시 이때만큼은 조잘대지 않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

부친이 금포를 입는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입지 않는다. 그녀들의 기억으로도 단 한 번인가 뿐이었다. 왜 운중보에 들어오면서 금포를 챙겼는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새벽녘에 일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그녀들이었다. 찾기는 쉬었다. 흑백쌍용과 헤어진 그 위치에 있었으니까. 일접의 죽음은 부친 못지않게 그녀들에게도 충격이었다. 허나 사인(死因)도, 흉수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저 놀라운 쾌검수가 아닐까 하는 추측만이 전부였다.

허나 상만천은 달랐다. 일접의 시신을 살피고는 흉수가 놀라운 쾌검수라는 점은 동의했지만 연검을 사용하는 자이고, 현란하거나 다양한 초식을 사용하는 자가 아닌 혹독한 훈련을 거쳐 암살이나 유독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검을 익힌 자라고 단정했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그리고 만나지 않기를 빌어야 한다고 주의도 주었다. 아마 그 역시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았다. 대개 시신에 나타난 흔적을 보면 그 무공이 무엇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무공의 원류(原流)가 어떤 것인지 대충은 밝혀지는데 반해 일접의 시신에 나타난 흔적은 도대체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시신을 살핀 이군(二君) 오위(五衛), 그리고 흑백쌍용까지도 머리를 저었다.

사충 중 봉(蜂)의 시신도 찾아냈다. 그녀의 사인도 심상치 않았다. 하여간 이로서 상만천은 자신의 눈과 귀가 모두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는 그 순간부터 생각에 잠겼는데 그의 안색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어쩌면 상대를 파악해 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던진 말은 의외였다.

"일접을 죽인 자는 운중선의 인물은 아니다."

그런 후에 그는 금포를 찾았던 것이다. 이미 옷매무새까지 완벽히 갖추어지자 상만천의 모습은 마의를 입었을 때와는 매우 달랐다. 마의를 입었어도 상대를 아우르는 위엄이 있었지만 금포를 입고난 후의 그의 기도는 만인을 호령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아버님… 조반을 차리라 할까요?"

상민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판국에 무슨 아침이냐고 호통을 들을 각오를 하고 한 말이었다. 허나 상만천의 태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룡각으로부터 정중한 초대를 받았는데 가 보아야지. 그게 예의 아니냐?"

추 태감의 초대에 응하겠다는 말이었다. 아침부터 의관을 갖춘 것이 단지 그 이유였던가?

"아버님!"

추 태감의 조찬에 가겠다는 의미를 모를 상민민이 아니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을 보며 상만천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이 애비의 마지막 대업(大業)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다. 가장 나중이기를 바랐지만 가장 먼저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상민민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부친이 서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적으로 빠른 감이 있다. 운중보에 들어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자 지금 부친은 단 한 번의 승부로 모든 것을 거머쥐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용추를 불러라. 그리고 이군과 흑백쌍용을 데려간다."

상민민의 예상은 맞았다. 부친은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일까?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고 나가는 상민민의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부친을 믿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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