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7회

등록 2007.05.17 08:20수정 2007.05.1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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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작정을 한 터라 모가두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바위도 가루로 만들 수 있다는 모가두의 쌍장을 정통으로 맞고 살아날 사람은 없을 터였다. 더구나 아무런 방비 없이 갑작스럽게 당했다면 그 충격은 훨씬 클 것이었다. 그래도 즉사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숨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이 더 놀랄 일이었다.

죽어가는 진번의 모습에 이번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올 줄을 알고 철저하게 준비했으며 너무나 쉽게 그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그로서는 이곳을 빠져나갈 자신도 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개죽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군."

체념이었다. 아니 이런 상황이 아니라 정당하게 승부를 가리는 기회나 장소였다면 이렇듯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실패를 의심하지 않고 완벽하다고 생각한 기습이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게 되자 기세가 꺾였다. 기세가 일단 꺾이면 본신의 무위를 팔할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이 승부다. 더구나 자신들의 의도를 이미 상대가 파악하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더 더욱 당황하며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자신감이라든지 투지와 같은 심리적인 요소가 실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분명히 성공하리란 믿음이 클수록 실패에 대한 대가는 잔인할 정도로 가혹했다. 더구나 실패를 생각하지 않아 대비를 하지 못했다면 더욱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한다. 무림인에게 있어 실패에 대한 대가는 대부분 목숨이었다. 지금 이번은 뼈저리게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운중보에 들어오는 것이 그리 위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천하를 주무르는 추 태감의 위명 하나로 감히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안이했다. 우리는… 그리고 추 태감은 이 운중보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군.'


그 동안 일류고수를 능가하는 무위를 가진 그들이었지만 기껏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비등한 정도의 상대를 만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저 호신무공 정도 익힌 자들이 고작. 개중에는 그럴 듯한 호위를 둔 자도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상대할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은 좌등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비록 좌등이 약간의 틈을 주어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십여 초를 교환하면서 느낀 결론이었다. 만약 부상을 당하지 않은 상태고,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불안감을 덜 수 있다면 좀 더 본래의 무위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좌등을 꺾을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는 마음을 비웠다. 무인에게 있어 체념이란 그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며 안정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 동안 한번도 사용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마지막 승부수를 떠올렸다.

파파팍----!

좌등의 쉴 새 없는 공격에 뒤로 서너 걸음 급히 물러나며 양팔을 수차례에 걸쳐 허공에 교차시켰다. 그의 소매바람이 주위의 공기를 가르며 찢어질 듯 비명을 토했다. 그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양 발을 길게 늘여 몸을 바싹 낮추었다. 궁둥이가 바닥에 닿을 듯한 일종의 부보(仆步) 형태.

머리 위로 현란한 창이 휙휙 파공음을 내고 있었다. 그는 양팔을 가슴께에 모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느릿하게 내밀고 왼손은 가슴을 보호하듯 뒤를 받쳤다.

"……!"

자세가 심상치 않았다. 좌등은 이번의 동작에서 마지막 승부를 보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전과는 달리 자세에 안정감이 엿보이고 범상치 않은 기도가 흘러나왔다. 좌등 역시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상대가 무인이든 아니든 최선을 다해주는 것이 무인의 도리. 그는 창의 중간을 옆구리에 끼듯 잡고는 왼손으로 수인(手刃)을 그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이번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뒷발을 바닥에 끌며 앞 발꿈치 뒤로 당겼다. 체중의 중심이 모두 앞발에 실려 있는 상태. 이런 경우 뒷발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 가는 뒷발에 달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뒷발이 옆으로 꼬이는가 싶더니 오른쪽으로 빠르게 이장 가량 움직였다. 동시에 좌등이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옆으로 도는 순간 이번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몸을 회전하고 있었다. 최대한의 탄력을 얻어 좌등을 향해 쏘아가려는 동작이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좌등이 그렇게 느끼는 순간 이미 이번은 앞가슴을 활짝 벌리며 위에서 내리꽂혔다.

파파파팍----!

불꽃과 같은 미세한 빛줄기가 이번의 열 손가락에서 쏘아 나오고, 허공을 수놓는 듯 했다. 진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에서 수비를 도외시한 이번의 화령지는 정말 위력적이었다. 좌등이 일시 뒤로 물러나자 그가 서 있던 바닥에 불꽃이 튀며 패이기 시작했다.

좌등의 얼굴이 굳어들었다. 저렇듯 같이 죽자는 공격은 정말 위험하다. 자꾸 피하기만 하는 것도 역시 더욱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일시 물러났던 좌등이 우측으로 돌며 창을 머리위로 끌어올려 맹렬하게 회전시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좌우로 역시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좌등 주위로 온통 일종의 막이 생기며 이번이 우박처럼 튕기고 있는 화령지가 불꽃을 일으키며 튕겨나갔다.

허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번은 전력을 다해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그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무슨 그리 진력을 사용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력을 날리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내공의 소모가 적지 않았다.

허나 이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수세로 일관하던 이번이 오히려 좌등을 압도하는 듯 보였다. 좌등은 수비에 치중하며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때 공격하는 것은 상대를 죽일 수는 있지만 자신 역시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이럴 때 성급히 움직이는 것은 금물이다. 젊었을 적 수많은 승부 속에서 얻었던 경험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번은 좌등의 엄밀한 수비에 막혀 더 이상 효과를 얻지 못하자 잠시 물러나는가 싶더니 빠르게 좌우로 신형을 움직이며 최대한 좌등과의 거리를 좁히려 애썼다. 이번은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고, 좌등과의 거리를 일장도 채 못 되는 곳까지 파고들자 그는 무작정 좌등 쪽으로 더욱 빠르게 다가들며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파파파팍----! 슈우----!

바로 이것이었다. 갑자기 이번의 손에서 피가 사방으로 내뿜어지며 혈막(血幕)이 허공을 빽빽하게 덮었다. 한 순간 이목이 흐려지며 이번의 모습이 혈막 뒤에 사라진 듯 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혈막을 뚫고 핏덩어리로 보이는 네 개의 조그만 덩어리가 빛살처럼 좌등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좌등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들었다.

자신을 쏘아오는 물체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번의 양 손 검지와 중지였고, 혈막이 시야를 가리는 순간 발출되었던 것이다. 그의 신형이 빠르게 한 바퀴 회전하면서 창을 현란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이 순식간에 열개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더니 사방의 방위를 차지하며 방어를 함과 동시에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의 눈에는 환영처럼 아주 느릿한 형상으로 자신의 목과 가슴, 그리고 복부를 찔러오는 것처럼 보였다.

팟팟팟----팟---!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 내어 쏘아간 네 개의 손마디도 좌등의 창에 막혀 허공에서 터져 사라지는 듯 했고, 급히 뒤로 물러난 이번은 목에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의 이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강한 인물이었던가?'

이번은 오히려 웃었다. 허무한 패배였다. 이미 좌등의 창은 자신의 목을 살짝 뚫고 들어와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찔러 넣는다면 자신은 코가 아닌 목으로 숨을 쉬게 될 터였다. 그래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손에서 떠난 손마디 하나는 좌등의 왼쪽 어깨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의 시선과 좌등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생사여탈을 가지고 있는 자와 남에게 목숨을 맡긴 자의 시선교환이었지만 부끄러움은 없었다. 이번은 차라리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가 좌등의 창에 찔리고 싶었다.

"가거라!"

어느새 좌등의 창은 이번의 목에서 사라졌다. 말을 던지는 좌등의 입 꼬리에는 씁쓸한 미소가 달려있었다.

"왜?"

"경고일 뿐… 운중보는 중원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중원이다. 보주께서 움직이는 또 하나의 세상… 운중보 내에서 보주께 무례한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는다."

전하라는 말일 것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진번과 같이 자신도, 아니 추 태감까지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이번은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꼈다. 동정 받은 목숨.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진번의 시신 쪽으로 다가가 시신을 안아들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살아있어야 치욕을 갚을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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