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82회

등록 2007.04.26 08:16수정 2007.04.2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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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유는 당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내가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해당되죠. 좌등어른도 포함해서요…."

"닥친 위험?"


"그래요. 모르면 피할 수 없는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위험이죠."

당화의 확신에 찬 말투에 풍철한은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뭔가 일들이 벌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일을 당화가 알고 있는 것이다. 풍철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당화가 저렇게 당당하게 모습을 보인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군. 너 역시 무언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것 같군."

그 말에 당화는 모처럼 밝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면 매우 매력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홍교 언니의 혈도를 풀어줘요. 그리고… 저녁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몹시 고프군요. 홍교 언니도 그러할 것이구요."


그 말에 옆에 서있던 생사판 종문천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 역시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소? 이대로 굶겨죽일 작정이오?"


생사판의 돌연한 모습에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함께 웃음이 피어올랐다. 헌데 매신쌍화가 제일 먼저 죽인 인물이 상양현(常陽縣)의 현감이었다가 강소(江蘇)의 지부대인이 된 감삭진(甘朔振)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상양현 상양서원(常陽書院)의 원주가 백도의 부친이었고, 백도가 그곳 출신이란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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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의 음식은 이미 식어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음식에 손대는 사람도 없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이미 저녁시간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을 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미 저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바쁘셨던 모양이오. 조금 늦은 것을 보니…."

상만천은 짐짓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조금이라니… 아주 늦었소."

귀산 노인이 말을 받았다.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고 이제야 온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자 마지못해 온 것이다. 그러니 귀산 노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을 일도 아니었다. 마치 '제멋대로 불렀으니 내 멋대로 왔다'는 표정이었다. 더구나 술시(戌時) 말이니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방해한 것에 대해 오히려 불만인 듯 했다.

"식었으니 새로 만들라 하겠소."

여전히 상만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 자신은 식사를 하지 않고 귀산 노인을 기다렸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귀산 노인이 손을 저었다.

"만보적께서 드시지 않았다면 새로 만들라하는 것을 말리지 않겠지만 이 촌노를 위한 것이라면 사양하겠소. 나는 기름진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한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먹지 않는 버릇이 있소."

그것은 마치 상만천이 자신이 만든 집이 아니면 자지를 않고, 자신의 숙수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자신이 직접 고른 여자가 아니면 같이 자지도 않는다는 습성을 빗댄 것도 같았다. 허나 만보적은 개의치 않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께서는 차를 즐기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직접 주위에 차나무도 심어 직접 만들어 드신다고 하더군요."

아직도 완쾌되지는 않은 듯 얼굴이 아직도 핼쑥한 용추가 은근히 말하자 옆에 서있던 일접이 다기를 가져다 놓고는 몇 가지 음식 접시를 재빨리 치웠다.

"그저 할 일이 없다보니 차나무 몇 그루 심어놓은 것뿐이오. 올해는 날씨가 좋아 제법 좋은 차를 수확할 수 있었소."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 법이고, 그 취향에 맞추어 대화를 하다보면 경계심도 사라지는 법이다. 용추의 말에 귀산노인이 흥미를 보이는 것 같자 상만천이 다기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자네는 몸도 불편한데 내가 하지."

말과 함께 상만천은 익숙한 솜씨로 차를 넣고 물을 따랐다.

"구하기 어려운 진품(眞品) 용정(龍井)이라는데 장사꾼이다 보니 다도(茶道)에 문외한이라 그 맛을 모르겠소이다. 노인장께서 진품 여부를 판별해 주시는 것이 어떠하신지?"

상만천은 의외로 정중한 모습이었는데 그렇다고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귀산 노인은 지금 상만천에게 있어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 중의의 지나가는 듯한 충고는 역시 무시할 것이 아니었고, 용추 역시 수차례나 말한 적이 있어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으음… 촌노 역시 진품의 용정을 맛본지가 하도 오래되어 가물가물 하오만… 용정이 맞는 것 같소. 오랜 만에 좋은 차를 마시게 되는구려."

음미하듯 차를 마시는 귀산 노인은 확실히 차를 아는 사람 같았다. 하기야 상만천이 어디 진품의 용정을 모르고 내놓았을까? 그는 다시 차를 우려내 귀산 노인의 잔에 따랐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용추가 불쑥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오래 붙들어 둘 수도 없는 일. 또한 이미 파악한 바에 의하면 아무리 회유한다 해도 마음을 바꿀 노인이 아니다보니 결론을 빨리 내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이미 귀산 노인은 이곳에 부른 이유를 알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허나 그것은 상만천의 생각과 달랐다.

"무엇을 말이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용추는 새삼 포권을 취하며 부탁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절실해서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천하의 용추선생이 이 촌노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주공께서는… 대의(大義)를 품고 계십니다. 그 일보(一步)가 바로 이곳 운중보이고…."

그 순간 귀산 노인이 손을 내저으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용추 선생의 말을 듣고 싶지 않소. 차라리 이곳에 대해 뭔가 알려달라면 알려드리리다. 나는 만보적께서 이곳에 들어온 사실에 매우 놀랐소. 추 태감이 들어온 것에 더욱 놀랐소. 그러면 된 것 아니오. 누군가 이곳에서 끝장을 보려하는 것처럼 만보적이나 추 태감이나 이제 끝장을 보려 들어온 것은 마찬가지요. 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알고 싶지 않고, 또한 누군가의 편에 서기도 싫소. 이 촌로의 여생(餘生)이 얼마나 남았다고…."

알고 있다. 분명 귀산 노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말을 하지 않아도 만보적이 품고 있는 웅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다만 나서지 않는다고 할 뿐이다. 그 순간 만보적의 눈 깊숙한 곳에 미세한 살기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위험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내일 있을 좌등과 광나한의 숭무지례는 지금까지 대립된 운중보 내부의 실세를 가름 짓는 사건이 될 것이었고, 복의 죽음이 누구로 인한 것인지도 알았다.

아무리 혈간의 조카이자 보주의 제자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아이를 함부로 죽였다는 것은 곧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아성에 도전한 자들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그 도전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이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손을 봐주어야 한다. 허나 옥기룡을 손을 보려면 철기문 전체를 철저히 짓밟아 놓아야 한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말이다. 어차피 작정을 하고 들어온 이상 한군데 정도 더 넣는다고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귀산 노인마저 알고 있다. 지금 상만천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귀산 노인을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득이다. 내가 가지지 못할 중요한 존재라면 상대에게도 역시 마찬가지고, 만약 상대가 귀산 노인을 얻게 되면 아주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성급한 결론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귀산 노인이 이곳에 온 이상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오늘밤 잠을 자지 않더라도 그럴 참이었다. 그러는 반면에 지금 귀산 노인이 여기에 와 있는 것으로 해서 그의 위험을 늦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귀산 노인의 생각이 그의 명을 재촉할지도 모르는 성급한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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