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81회

등록 2007.04.25 08:16수정 2007.04.25 08:16
0
원고료로 응원
홍교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설마라고 생각했던 소유향이 정말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정확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도 몇 명의 고위 관리들이 살해되었지. 칼을 맞거나 목이 졸려 죽은 경우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한결같이 침상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어. 또한 그들은 한결같이 외모가 반반한 처녀를 상대하다가 그 지경을 당했는데 처음에는 외모가 달라 변장술에 능한 여자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사건이 계속되면서 두 여자에 의한 것이란 사실이 밝혀졌어. 그 두 여자가 어떤 때는 기녀로… 어떤 때는 시비로 들어가 그들을 유혹해 죽였던 것이란 사실도….”


그 말에 능효봉이 약간은 놀라는 듯한 음성을 발했다.

“매신쌍화(賣身雙花)…?”

지방의 포두들은 물론 동창에서도 거론된 적이 있었던 이름이었다. 고위관리들이 잇달아 살해되자 동창에서까지 잡으려 나선 적이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녀들의 흔적은 발견해 낼 수 없었고, 일년 반 전쯤부터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였다.

매신쌍화란 말이 나오자 그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매신쌍화란 말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고, 또한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매신쌍화에게 죽은 고위관료들은 모두 동림당원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너는 시비로 썩기엔 아까운 여자로 보이더군. 화장을 하고 옷치장만 한다면 아주 뛰어난 미모가 될 것 같았거든. 그리고 사람이란 아무리 모습을 바꾸려 해도 본래 자라면서 가지게 되는 기품이란 것이 있는 법이야.”


태어나면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자라온 환경은 사람의 본성이나 외모마저도 바뀌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외모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기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다. 홍교는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너는 보통 시비와는 달리 무공에 대해 아는 것 같더군. 연금참맥법이 무언지는 몰라도…. 하기야 나도 모르니까…. 그것에 대해 설명을 듣는 네 모습을 보면 기혈(氣穴)과 맥(脈)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 결정적인 것은 매신쌍화 중 언니 되는 여자의 귀밑에는 특이하게도 청살선(靑殺線)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야. 네가 귀를 반쯤 가리고 있는 것에 대해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


여자란 확실히 다르다. 사내라면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아주 조그만 부분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 전 점혈을 할 때 유심히 홍교의 여기저기를 살폈던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부인할 거야?”

귀밑에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 푸른 핏줄 선을 살살 간질이듯 만지는 소유향의 손길을 피하며 홍교는 고개를 홱 젖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위축된 모습이 아닌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었다. 헌데 그녀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열려진 방문 쪽에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맞아요. 남들은 우리를 몸 파는 두 송이의 꽃이라고 부르더군요.”

열려진 방문으로 모습을 보인 여자는 뜻밖에도 홍교와 같이 있던 당화(棠花)였다.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당화는 아주 떳떳하게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미안해. 언니…. 시간을 맞추지 못했어. 추태감의 속내를 모두 알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어.”

그녀의 말은 의외로 많은 부분을 함축하고 있었다.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는 말은 홍교가 홀로 남겨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고, 그 시간에 맞추어 구하러 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제는 추태감의 속내를 모두 알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언니의 혈도를 풀어주시겠어요? 너무 불편해 보이는군요.”

당화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소유향에게 요구하는 듯 보였다. 또한 그녀는 풍철한과 좌등, 그리고 함곡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에게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왜 혈도를 풀어주어야 하지?”

소유향이 당화의 태도에 아주 재미있다는 듯 색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주 여유있는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당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지만 조금도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당신이 언니의 혈도를 반드시 풀어주어야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어요.”

“세 가지…?”

당화의 당당한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스스로 몸을 나타낸 그녀가 갑자기 도망가거나 다른 짓을 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하나는 당신들이 우리를 이렇게 속박하거나 잡아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고 따라서 당신들도 우리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는 것이죠.”

여전히 같은 시비 차림이었지만 청룡각에서 보였던 그녀의 모습은 간곳이 없다. 역시 소유향의 말대로 사람의 기품이란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홍교란 이 여자는 서당두와 신태감의 살해용의자로 이곳에 잡혀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아니 정확하게 함곡선생과 풍오라버니는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할 책임이 있는 사람임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분명히 알고 있어요. 서당두와 신태감의 죽음에 우리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죠.”

“소민(小珉)아…!”

당화가 너무나 순순히 인정하자 듣다 못한 홍교가 당화를 불렀다. 아마 당화의 본명이 소민이던가 아니면 둘 사이에 부르는 이름인 것 같았다.

“괜찮아… 언니… 어차피 이제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었잖아. 물론 우리 손으로 추태감의 목을 따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곧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안쓰러운 듯 홍교를 바라보던 당화의 두 눈에 언뜻 물기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주위의 인물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우리는 복수를 했어요. 아직까지 죽여야 할 인간들이 너무 많고 우리의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그들을 죽일 거예요.”

“사람의 목숨은….”

소유향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당화가 중간에서 잘랐다.

“당신들이 무엇을 알고 있지요? 단지 동림당원이고, 나라를 위해 쓴 소리 몇 마디 했다고 느닷없이 흉기를 들고 들어와 가솔 모두를 잔혹하게 살육당한 경험이 있나요? 아무도 시신을 치우지 않아 썩어가는 시체를 밤중에 몰래 치워야 했던 십오륙 세 여자들의 아픔을 생각이나 해보았나요? 결국 몸을 팔면서 복수를 해야 했던 소녀들의 고통을 생각해 보았냐고요….”

“……!”

단 몇 마디 당화의 말은 그녀들이 왜 그래야했는지 알게 만들었고, 소유향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시비 차림이지만 바뀐 그녀들의 태도를 보니 분명 양갓집 딸들이다. 어쩌면 학유 집안에서 태어나 글줄께나 읽었던 규수들일 수도 있었다. 당화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누르려는 듯 숨을 크게 두세 번 내리쉬더니 애써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절대 당신들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또한 우리는 당신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여기 운중보 내에 함곡일행의 적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조사하고 흉수를 밝혀내는 입장이지 누구를 적으로 생각해 상대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허나 그녀의 말은 아주 묘한 느낌을 주고 있어 반박할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 안에 있는 몇 사람에게는 정확히 해당되는 말일 수도 있었고, 단지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우리 보고 조사를 포기하란 말이야?”

풍철한은 참으로 난감했다. 동림당원의 딸로 동림당원을 숙청할 때 앞장섰던 인물들을 골라 죽인다는 그녀들의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자신보고 어쩌란 말인가?

“어차피 풍대협도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이 사건을 조사하고 싶어서 조사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모든 것은 누군가의 뜻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아무리 돌려놓으려 해도 돌려놓을 수 없고, 또한 당신들이 돌려놓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요? 당신들도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아예 대놓고 함곡과 풍철한의 속내를 까발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풍철한 일행의 처지를 매우 정확히 알고 있었고, 누가 들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심각한 말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2. 2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3. 3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4. 4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5. 5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