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장춘> 신윤복, 18세기, 지본담채, 27.2x15.0, 국립중앙박물관
위에서 말했듯이, 이 그림을 그린 직접적인 계기는 안평대군의 꿈이에요. 하지만 이그림의 기원은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입니다. 중국 역대 화가들은 이 이 시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조선에서도 역시 그러했지요.
이 이야기 속 무릉도원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무릉'이란 곳에 한 어부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강에서 고기를 잡는데 어디선가 복숭아 꽃잎이 막 흘러내려왔어요. 어디서 흘러내려오나 하고 따라 올라가보니 강이 시작되는 곳에 동굴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서 동굴을 빠져나가자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어요. 마을 안에는 진나라 때 전쟁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들의 후손들이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어부를 융숭히 대접해서 보냈어요. 어부는 자기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와 관가에 그 사실을 알리고, 그 곳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못 찾았다고 합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이처럼 복숭아꽃을 이상적인 세계에 피어있는 꽃으로 여겨왔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몽유도원도>가 이상계에 대한 꿈을 그리면서도 실제로는 권력투쟁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권력투쟁 한가운데 몽유도원이 있었네
<몽유도원도>를 그릴 당시의 현실 속에는 처절한 권력투쟁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야심가 형님 수양대군이 내미는 사약을 마셔야만 했던 동생 안평대군과 이 그림을 찬미하는 시를 바친 선비들에게 불어 닥친 피비린내. 안평의 꿈은 이 일촉즉발의 권력투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소망의 표현이었을까요? 모르겠어요.
안견은 이 적막한 황홀경을 그리며 안평대군에게 닥칠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어떤 예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안평대군은 꿈에 대해 안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여럿이 들어갔는데, 둘만 나왔다"고. 안견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까이 와 있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죠.
안견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안평대군의 집을 빠져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평대군이 아끼는 귀한 중국 먹을 훔쳐서 도포자락에 넣었습니다. 안평대군은 당연히 사람을 불러 먹을 찾는 소동을 벌였지요. 그 와중에 안견이 일어서며 먹을 떨어트리자, 안평대군은 노하여 안견을 내쳤습니다.
안견은 부리나케 안평대군의 집을 빠져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의 무리들이 그 집을 덮쳤습니다. 모두 죽고 안견과 신숙주 두 사람만이 살아남은 것이죠. 꿈 그대로이죠. 믿겨지나요?
덧없어라! 복사꽃 흐드러진 봄날의 꿈이여! 안평대군과 그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이 그림만 남아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다음의 시는 안평대군이 이 그림에 붙인 글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은가.
삼 년 뒤에 정월 초하루 밤,
치지정 안평대군의 거처 이름.
에서 다시 이를 펼쳐보고서 짓노라.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後三年正月一夜, 在致知亭因披閱有作. <안견과 몽유도원도> (안휘준·이병한 공저, 예경산업사) 161쪽에서 재인용.
꽃이 지기 전에 들판으로 나가세요
복숭아꽃은 따뜻한 봄날 화사하게 피어난 아름다운 미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날씨가 가장 좋은 4~5월에 피는 분홍색 꽃은 수줍은 처녀의 뺨처럼 붉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녀의 이름은 아예 '도화랑'입니다.
또 복사꽃과 관련해서는 '인면도화'라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복숭아꽃처럼 어여쁜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된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인데요. 만나지 못할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깊어져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생각이 되지요.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숭아꽃은 아름다운 여인, 젊은 여자를 상징합니다.
또 춘화에도 잘 등장해요. 남녀의 성적 정념에 가장 잘 어울릴 꽃이기 때문이지요.
풍속화가 신윤복의 <사시장춘>이란 유명한 춘화에도 이 꽃은 피어 있어요. 한갓진 구석 방, 방문 앞에 급히 벗어던진 듯한 남녀의 신발 두 켤레, 문 앞에 술병을 들고 온 계집종이 그려져 있지요.
이 춘화에는 '기척을 내고 술병을 들이밀어야 하나, 모른 체 돌아서야 하나' 고민하는 계집종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방문 옆에 꽃이 한창 핀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요.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님은 이 그림을 한국적 춘화의 으뜸으로 친다고 합니다. (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손철주, 생각의 나무) 42쪽 참조)
색을 밝히는 바람난 여자의 사주를 '도화살'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하긴 복사꽃이 얼마나 예뻤으면, 옛날에는 집안 여자들이 바람날까봐 정원에는 이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현대여성들은 도화살 아니라 세상없어도 복숭아꽃처럼 예쁘기를 바랍니다. 열아홉 처녀아이의 볼처럼 발그레한 복숭아꽃, 잠시 머물다 사라질 안타까운 아름다움이지요.
이 봄, 그 꽃이 다 지기 전에 들판으로 나가보세요. 저는 시댁이 있는 강원도 춘천으로 복숭아꽃을 보러 떠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 <동양명화감상 (이상희, 니케)> <회화 (이원복, 솔)> <그림, 보는만큼 보인다 (손철주,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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