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 당시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안경다리. 광부들은 안경다리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찰의 접근을 막았다. 광부들은 최루탄을 쏘며 기어오르는 경찰들을 향해 철로에 있는 돌을 던졌다.강기희
검은 땅, 검은 산이었던 시절 사북에 사는 사람들도 검은 차림이었다. 검은 얼굴, 검은 손을 하고서 탄광을 나선 이들은 탄을 캐는 산업 전사. 그들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의 광부들이었다.
산업전사라는 이름으로 국가 에너지를 생산하던 이들의 손은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더 바빠졌다. 당시 정부는 '제7광구'라는 노래까지 유행시키며 석유파동을 넘어서려 했지만 이 나라에서 석탄 외의 에너지를 확보하는데는 실패했다.
당시 사북 동원탄좌에서 캐 내는 석탄은 전국 생산량의 9%. 생산량만으로도 동원탄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석탄을 캐 내는 것은 광부들의 몫이었다. 광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3교대로 개미집 같은 막장을 드나들었다.
어용노조와 회사가 광부들 분노케 해
광부들은 스스로를 '막장인생'이라 했다.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인 탄광에서 일하는 그들에게 한 밑천 잡아보겠다는 욕심은 애초 없었다. 갈 곳 없어 밀려난 인생들이라는 자조가 그들 스스로를 막장인생으로 내 몰았다.
동원탄좌는 타 업체에 비해 정년도 빨랐다. 정년 45세로 묶여있는 동원탄좌에서 밀려나면 그들은 하청 탄광으로 몸을 옮겼다. 그들이 선택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탄을 캐고 나르는 일 밖에 없었다.
일을 그만두라고 할까 싶어 진폐증에 걸렸어도 애써 병증을 숨기며 일을 했다. 살아남는 일이 절박한 시절. 대형 탄광인 동원탄좌에 다니는 것만 해도 영광이라 여겼다. 그런 이유로 목욕탕 시설은 언감생심, 먹을 물도 나오지 않는 성냥갑 같은 사택에서 견뎌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광부들은 미래를 품고 살아갔다. 그러던 탄광노동자들이 떨쳐 일어났다. 1980년 4월 21일이었고, 신군부의 총칼이 서늘하게 빛나던 봄날이었다. 이른 바 '사북사태'다.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된 '사북사태'의 배경엔 억눌린 노동자들의 분노가 있었다.
어느 회사를 막론하고 당시만 해도 어용노조가 판을 치고 있었다. 어용노조는 회사와 권력의 비호아래 노동자들 위에 군림했다. 노동자들 편에 서야 할 노조는 회사와 권력의 편에 있었다. 신군부인 합동수사본부도 그들을 용인했다.
사북사태는 계엄상황에서 터졌다. 서울의 봄은 왔다지만 모두들 숨죽이고 있던 때였다. 해발 700m가 넘는 사북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날은 포근했고 비도 오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 광부들이 채탄을 거부하고 경찰과 마주쳤다.
사건의 발단은 동원탄좌 노조지부장인 이재기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광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어용노조의 지부장이었다. 광부들은 사북사태 이전부터 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사퇴를 촉구했다.
21일 경찰과 사북읍사무소가 약속한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자 광부들이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지부장인 이재기는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 50여명이 동원탄좌로 출동했다. 하지만 숫적으로 밀린 경찰들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달아나려던 경찰 지프를 광부들이 가로막았다. 다급했던 경찰은 앞을 가로막은 광부들을 치고 달아났다. 광부 네 명이 차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다. 일부 광부들은 경찰이 광부를 죽였다며 흥분했고, 사태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북사태의 발단은 동원탄좌와 노조지부장인 이재기였지만 불은 경찰이 질렀다. 21일 오후 시위 해산을 위해 사북을 찾았던 장성경찰서장이 몰매를 맞는 일이 생기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노동자민중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북항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북항쟁, 경찰이 도화선에 불 지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