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에서 1978년에 펴낸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한길사
박 선생이 남긴 다양한 논문들과 저술들과 강의는 참으로 방대했고,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늘 치열한 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경제평론가'라는 '직함'으로 그가 써내는 글과 저술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이었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경제와 사회, 역사와 현실을 보는 문제의식과 안목을 그는 키워주었다. 결코 잘 읽힐 수 없는 에세이와 논문과 저술들이었지만, 한 시대의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인기 저자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혼신의 힘으로 쓰고 혼신의 힘으로 역사의 편에 서는"(<민족경제론> 머리말) 그의 저술의 자세와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박현채 선생을 만난 것은 1973년이었다. 신문에서 잡지로 옮겨 일하게 되면서 '쌀의 반세기', '다국적 기업의 논리와 행태', '차관과 국민경제'와 같은 선생의 글을 청탁하여 싣게 되었는데, 우리들은 유신 치하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잡지저널리즘으로 관철시키려 했다. 잡지이기 때문에 겉으로 크게 노출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의 의지를 어느 정도는 더 잘 관철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 자유언론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우리들의 문제의식 또는 자유언론정신이 박 선생의 호흡과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1975년 3월에 동아일보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문사 복귀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자 1976년 출판사를 등록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판은 또 다른 차원의 언론일 수 있었다. 이제 기자로서가 아니라 출판인·편집자로서 나는 박현채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에는 '민족경제론'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박현채 평론선'이란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다가 나는 선생에게 '민족경제론'으로 하자 했고, 선생이 이에 동의했을 뿐이다.
글들의 내용으로 보아 '민족경제론'이 타당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렸고, 박 선생도 그래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 후 한길사는 박 선생의 이런저런 책들을 내거나 글을 실을 때 제목을 내가 먼저 이렇게 저렇게 붙이자고 안을 냈고, 선생은 늘 동의하는 편이었다.
치열한 논리와 정신을 가진 저술들이었지만 박 선생은 출판사와 편집자의 견해에 대해 담대한 편이었다. 우리 출판사로서는 참으로 소중한 저자 한 분이었지만, 선생은 책 만들기에 늘 편안하고 관용했다.
1978년 4월 '오늘의 사상신서' 제5권으로 출간된 <민족경제론>은 출간되자마자 젊은 독자들의 비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독자들의 힘찬 반응은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이미 <우상과 이성>으로 리영희 선생이 구속되어 있는데다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고은 선생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안병무 박사의 <시대와 증언> 등으로 한길사의 '오늘의 사상신서'는 당국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당국으로부터 '경고'가 출판사에 전해져 오기도 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민족경제론>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판금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해달라고 했다.
권위주의 정치시대에 독자들의 '열독'이 권력에게는 문제가 된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을 권력은 위험시한다. '금지'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민족경제론>은 결국 출간된 지 석 달 만에 조심하라던 그 당국자로부터 '판금통지'를 통보받았다.
1978년 '판금'의 시련... '문제도서'에서 '필독서'로
한 권의 책이란 한 시대의 역사적 소산이다. 한 시대는 그 시대와 상응하는 '한 권의 책'을 탄생시킨다.
<민족경제론>이란 한 권의 책은 한 시대를 혼신으로 성찰하는 지식인 박현채의 개인적 저술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의 <민족경제론>은 그 시대의 독자들, 그리고 다른 여러 조건들과 더불어 존재하고 발전하는 역사적 산물이 되고 있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에서 "역사의 편에 서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또는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은 그 시대를 사는 독자들의 것이 되고 있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은 생활하는 민중의 소망에 좇아 국민경제의 내용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족경제론>을 왜 판금시키는지 당국자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한 바도 없었다. 유신권위주의 권력이 날로 강퍅해지면서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열독한다는 그 정황과 분위기가 판금된 이유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1978년 7월 초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판금'되는 역사적 시련을 겪지만 한국현대사의 '문제도서' 또는 '명저'로 자리잡는다. <민족경제론>은 이미 5천 권 이상이 독자들의 '소유'가 되었고, 이들 책은 젊은이들이 돌려가며 독서하는 '문제도서'가 되었다. 때로는 복사·복제되어 토론하는 '필독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작 또는 명저란 스스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더불어 그 시대상황이 탄생시켜낸다는 사실을 <민족경제론>은 증명해 보였다.
만약 그때 <민족경제론>이 판금되지 않았다면, <민족경제론>이 그만큼 한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민족경제론>이라는 한 권의 책의 이론과 사상은 저자 박현채와 그 시대의 상황과 역사가 '공동으로' 만들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독자들이 '명저를 만드는 운동'에 연대하는 것이다.
검열보조원들 "읽어보니 참 좋은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