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준 감독박은영
- 고 조은령 감독은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어떤 존재였나?
"당시 조은령 감독은 재일사회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덩달아 남편인 나도 혜택을 누린 거다. 이미 조 감독이 2년 동안 신뢰를 쌓고, 진심으로 교감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조 감독이 세상을 떠났을 때 동포들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주었다. 사람들이 고생 많았겠다고 하는데, 정말 하나도 고생한 것이 없다. 조 감독 덕분에 특별대우를 받은 거다, 행복한 거다."
- '북'과 '총련'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벽을 허무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
"처음 조은령 감독의 스태프로 히가시 오사카 중급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강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김일성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고, 나이 지긋한 관료들이 연설중이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남학생의 교복들…. 온통 까맣지 않나. 그 중 진한색은 사진과 인공기뿐이었는데, 정말 압도적이었다. 깜짝 놀랐다. 내 안에 있는 반북 이데올로기는 그만큼 무서웠다.
근데 촬영을 하면서 보니까 애들이 졸고 있더라.(웃음) 서로 '툭툭' 치고 깨우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고…. 영락없이 우리 아이들하고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 물음표가 생겼다. 선생님과 아이들 서로 펑펑 울면서 추억을 나누는 걸 찍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 이 아이들이 졸업해서 일본사회로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그 사이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벽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 같다."
- 처음 기획을 했던 조은령 감독 없이 영화를 완성했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조은령 감독은 나와 살아온 배경이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조선학교를 보는 순수하고 깨끗한 눈이 있었다. 곁에 없으니까, 영화를 찍을 때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촬영감독이었고 연출자가 아니니까, 자신이 없었다. 처음 기획한 사람이 내가 아니니까 자꾸만 조 감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다. 6개월을 찍고 나니 '도저히 이러면 안 되겠다' 싶더라. '조은령은 잊고 내 눈으로 봐야 된다, 내가 연출자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해보자', 그러면서 촬영이 편해졌다."
- 영화에서 북한으로 졸업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만경봉호에 올라 '명준 감독'을 외치며 'LOVE'라고 그려 보이는 장면이 있던데(김명준 감독은 국적이 달라 그 배에 오르지 못했다), 행복했겠다.
"아니다. 행복하지 않았다. 같이 출발해서 혼자 돌아오려니 앞이 깜깜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 싶지 않나. 그러나 나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으니까, 선생도 아니고 한국에서 왔고….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애들이 갑판위에서 손 흔들어 줄 때, 고마운 것보다 분하고 원통했다. '이게 뭔가, 내가 한국도 아니고 일본땅까지 와서 분단을 온몸 부서지게 느끼다니.' 만경봉호 타기 전엔 너무 친한 동생들이었는데, 배에 타는 순간 눈앞에 커다란 벽이 생겨버렸다. 무서웠다."
"재일조선인들의 삶 자체가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