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MBC 기자가 2005년 8월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조사에 응하는 입장을 밝히는 모습.오마이뉴스 권우성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법원 최고의 경륜가들이신 대법관님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MBC 기자 이상호라고 합니다. X파일 사건 관련 피고인입니다.
그럼 상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번 재판 결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소 자체를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심 판결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우리 법원이?' 그랬다가 2심 판결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특히 판결내용 중 기소되지도 않은 다른 언론 보도까지 싸잡아 유죄라고 '선언'해 버리는 대목이 아주 박력 있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유죄라도 괜찮습니다. 보도를 위해 '죽어도 좋다'고 각오했는데 이 정도면 오히려 고맙지요.
주제넘게도 저는 법원이 걱정입니다. 이따금 상식에 반하는 판결로 법원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법원을 다음 세대는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요. 저야 제가 보도한 X파일 내용을 상기시키고자 상고하게 되었지만, 대법관님들께서는 법원 신뢰 회복을 위한 천재일우의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X파일'이 시민이 알 필요 없는 사안인가요?
재판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관계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대신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특히 2심 재판부와는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국민들도 큰 시각차에 깜짝 놀랐고요.
이른바 X파일은 '삼성그룹이 수백 억 원대의 뇌물을 정치권과 검찰 등에 살포해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 한 모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모의는 상당 부분 실제 이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모의를 '민주공화제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쿠데타적 범죄행각'으로 보고 '시민들이 알 필요가 있다' 싶어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X파일의 모의 내용이 '국가질서에 직접 영향을 미칠 만한 일도 아니고, 그저 부끄럽고 추잡한 수준의 개인적 프라이버시'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알 필요가 없는 사안'으로 봤습니다.
사실을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사소한 부분까지 견해가 엇갈립니다. 이를테면 저는 X파일 내용을 현재진행형으로 본 반면, 2심 재판부에겐 이미 지난 '과거의 일'에 불과한 모양입니다. 이번 재판의 핵심은 일견 법리 공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의식의 경합입니다. 공동체의식의 경합입니다. 대법관님들의 전향적인 판단을 기대합니다.
바쁘신 대법관님들께서는 이제 그만 읽으셔도 됩니다. 여기까지가 제 법률적 상고 이유거든요.
고발기자질의 대가로 법원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절감하게 됐습니다. 소송과잉, 판결만사! 세상 모든 진실을 법원이 재단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재판관들의 어깨가 너무도 무거워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법원으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석궁 테러' 사건도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진실 회복의 일차적 책임을 대학 스스로 다하지 못하고 법원에 떠넘겨 생긴 일 아닙니까. 화살은 법원이 맞았지만 대학이나 언론, 어느 누구도 그 화살촉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법복을 입은 재판관들을 보며 문득 방탄복을 입은 우주인 모습의 폭발물 처리반원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얼까요. 모두 대화 박스를 스스로 풀지 못하고 법원 담벼락 너머로 투척하고 있습니다.
다 우리 사회 윤리 자산이 부족한 탓입니다. 공동체 내 합의를 통해 이견이 통합되고 잘잘못이 가려지는 것이 옳습니다. 사회에 어른도 없고 축적된 가치가 없으니 저마다 제 관점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툽니다. 신문은 한 줌 사주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고 인터넷엔 저주의 주문들이 종양처럼 증식되고 있습니다.
세계 11위의 부국이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공동체의 가치가 너무도 결핍되어 있습니다. 종교는 제 역할을 못하고 젊음은 쉬 시들어갑니다. 상식의 회복이야말로 마지막 보루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상식에 입각한 제 상고 이유를 잠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