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X파일'의 내용을 보도한 자사의 이상호 기자가 검찰에 소환된 지난 해 8월 5일 오후 MBC 기자들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은 국민의 뜻에 맞설 것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이건희 일가' 자존심 구겼다는 이유로...
존경하는 재판장님, 눈치 채셨겠지만, 저로서는 본 재판 결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재판부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원천적으로 검찰 공소의 정당성을 존중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로 가득한 이상한 시대, 또 무엇이 새롭게 이상할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이건희 일가의 엄청난 범죄 행위는 왜 그대로 놔두고, 그들의 자존심을 구겼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아닌 국가 기관인 검찰이 나서서, 무리하게 저를 기소한 것일까요.
또한 검찰이 적용한 통비법이란 과연 어떤 법입니까? 물론 개인의 통신비밀을 보호해야겠지요.
따지고 보면, 저희 MBC야 말로 개인의 통신비밀 보호를 위해 앞장선 언론사 아닙니까. X파일 보도를 통해 국가 공권력의 무차별적 도청을 고발하였고, 과거 잘못된 관행을 파헤쳤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해 상은 못 줄망정, 도리어 기소하는 검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실제 저희 보도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개인들의 통신비밀이 보호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는, 보호되어서는 안 되는 비밀도 있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보호하려는 통신비밀이 과연 어떤 내용입니까? 예를 들어, 국가 헌정질서의 파괴를 모의하는 전두환 일당의 밀담이 녹음됐습니다. 광주 유혈 학살을 계획하는 신군부의 대화 내용을 입수했습니다.
마땅히, 저는 백번 보도할 것입니다. 그래도 검찰은 저를 기소하시겠습니까?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권력보다 더 무서운 게 오늘날 자본권력이라는 게 저의 믿음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법조계도 요즘 브로커 문제로 시끄럽지 않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정치권력은 한철이지만, 자본권력은 장구합니다. 박정희 정권도 20년을 못 넘겼고, 전두환 일당도 10년여 밖에 못 해먹었습니다.
하지만 자본권력은 군부독재처럼 '체육관 선거'조차 필요치 않습니다. 선거 없는 권력, 그게 자본권력이지요.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자신들의 자본의 아성만 구축해 놓으면, 만사형통입니다. 대를 이어 그냥 가는 거지요.
'돈에 의한 국권 찬탈 음모', 보호될 수 없어
정치적 구호가 공염불에 그치고, 희망도 비전도 모두 소득이나 수출, FTA… 이런 '돈의 가치'로 매개되며 귀결되고 마는 오늘날, 본격적인 '돈의 거버넌스'-돈의 통치-가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물어뜯고 짖어야할 대상으로 정치권력만큼이나, 자본독재도 중요해졌습니다. 그만큼 X파일 보도가 필요했다는 얘깁니다.
이건희 일가에 의해 모의된, 돈에 의한 국권 찬탈 음모는, 단 한 순간도 보호되어서는 안 될 '반헌법적 통신비밀'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비밀이 검찰을 통해 보호되고, 사법적 절차를 통해 유지된다면, 이 검찰과 사법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누구의 기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매우 특수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검찰은 이건희 일가로부터 더러운 돈을 받은 것으로 진술된 당사자입니다. 그리고 관련 사건이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을 피고인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검사는 동일체로 불릴 만큼 견고한 단일 조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범죄가 기록된 비밀 테이프가 언론에 공개되었다면, 적어도 자신들에게만은 가혹한 메스를 댈 수 있어야, 비로소 해당 사건을 수사하건, 기소하건 그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과 간단한 서면조사만으로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무죄를 선고하고, 자신들의 치부를 공개한 기자만을 상대로 사법정의를 펼치겠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 정의를 지지해주겠습니까.
해서, 본 재판부의 선고는 법조사에 있어서는 중대한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저의 관심의 대상은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훌륭한 인품의 재판장님께서, 전향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으실까 기대는 해봅니다만, 그 역시 재판부 양심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본 공판에 대한 재판부의 성실한 자세에 대해서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저한 심리를 위해 재판부는 보도의 절박성과 정당성의 원천이 되었던, 녹취 테이프에 대한 검증을 실시해주시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어찌되었든 수사과정에서 인간적인 온정을 나눠주신 검사님의 배려에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