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노조 파업 사태가 23일로 12일째다. 금창태 사장 등 시사저널 경영진은 지난 22일 직장폐쇄 조치를 하겠다고 노조 집행부에 전격 통보했다. 직장폐쇄 조치로 농성을 풀고 복귀의사를 밝히지 않는 노조원들은 사측에 의해 편집국 출입을 통제당하게 된다.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언론은 어떤가? 언론을 탄압하던 권력의 마수가 사라진 그 자리는 더 큰 공룡인 자본이 차지하고 앉아 언론의 목을 조이고 있지 않은가. <시사저널> 사태는 극에 달한 자본의 횡포가 곪아터진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목숨 바쳐 쟁취하려 했던 자유언론의 꽃은 지금 언론인이 아니라 언론자본가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언론자유'를 맘껏 누리는 그들에게 장악된 언론이 극우보수와 자사이기주의에 빠져 정도의 언론은 실종되고 나라의 민주화와 정의는 질식상태에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물론 자본가가 주인이 아닌 일부언론들은 이같은 탁류에 저항하려 하지만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들 언론재벌이 초래하는 폐단 중에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여론의 오도와 가치의 전도이다. 신자유주의니 시장경제니 해서 모든 가치의 뿌리가 이윤추구를 최대목표로 하는 자본에서 출발하고 있는 이들 언론에 의해 생산되는 전도된 가치가 대다수 국민들에게 정상적인 올바른 가치이며 도덕률인양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정책이나 국가비전은 찾아보려해도 볼 수 없는 야당을 부추기며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지만 이들 언론의 장단에 놀아나는 국민들은 이미 한통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언론계의 혁명적 사건이라 할 시사저널사태에 대해 단 한줄, 단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은 언론계의 야합적 침묵으로 인해 시사저널 사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짝퉁 시사저널'을 정상적으로 발행된 잡지인양 오인하는 불행한 사태인 것이다.
이것은 과거 우리 동아투위가 겪은 바와 똑같다.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자유언론실천선언→광고탄압→격려광고→기자대량축출'의 일련의 언론운동과정은 전 세계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 '러브조이 언론상'을 수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유수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후속보도도 잇따랐었다.
그런데 국내언론은 어떤가. 박정희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진보적인 언론과 방송을 제외하고는 보도금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쫓아낸 동아일보사는 '10·24자유언론실천운동'을 자신들이 한 운동이라고 매년 4월 창간기념일에 선전함으로써 우리의 운동을 도용하고 우리의 존재를 말살하고 있다. 우리의 투쟁실상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그대로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아투위 위원들의 희생을 감수한 투쟁의 실상과 그 성과, 그리고 박해 등이 침묵 속에 가려져 있는 현실이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이기에 <시사저널> 기자들의 용기와 투지와 고통을 너무나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동아투위와 <시사저널> 기자들의 투쟁의 공통점은 편집권 쟁취라고 할 수 있다. 편집권은 언론활동의 핵심이다. 문제는 언론사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편집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주는 사주대로 자신이 돈을 대서 만든 신문사이니 만큼 자기 마음대로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기자는 기자대로 취재일선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자신들의 이념대로 신문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시사저널 사태, 동아투위와 닮은 꼴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노선의 차이로 이어져 신문사내의 갈등을 빚기도 한다. 따라서 언론사 구성원들의 편집방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편집권 보유문제는 항상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메이저신문사들이 조용히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주가 편집권을 쥐고 나머지 구성원들이 그에게 종속되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 또는 자본의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편집권이 "기자 또는 발행인의 전유물이 아니고 양자가 함께 가는 것이고 총체적인 것"(김선주 칼럼, <한겨레> 지난 1월 10일자)이라고 규정될 때의 편집권은 언론의 정도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편집권은 정도의 언론을 뒷받침할 수 있을 때에만이 그 권리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누가 갖느냐보다 어떤 형태의 편집권이냐라는 질적 내용이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편집권이라야 그 타당성과 정당성이 담보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도의 언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언론이라면 이 조건들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제작되어야 하며 그 구성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옳다.
방정배 성균관대 교수는 '편집권의 독립성'을 "국민의 정보권, 미디어접근권, 진실추구권 같은 헌법적으로 보장된 언론의 자유와 권리를 충족시킴으로써 공익에 이바지할 언론자유"로 규정하고, 이 언론의 내적 자유(편집권)가 사주나 경영권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고 밝혔다(2001년 3월 16일 발표 <언론자유와 그 반역의 논리-동아투위 4반세기 존재의미를 중심으로>).
이와 같이 매체 소유·경영·영업의 자유가 언론자유라는 간판 아래 내적 자유를 억압하는 기막힌 한국언론현실을 '언론자유의 반역의 논리'로 칭한 방 교수는 "이처럼 변질된 언론자유(매체자유)가 제한됨으로써 편집권과 편성권 등 언론내적 자유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규제 논리가 학계를 비롯하여 시민운동단체들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21세기판 동아투위', 우리 모두의 불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