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남소연
- 자신의 삶을 바꾼 중요한 계기를 꼽는다면?
"난 개인적으로 상당히 굽이굽이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철이 든 이후 주요한 역사적·민족적·국가적 문제에서 관심을 떼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는 한일회담, 고등학교 때는 3선개헌, 대학 때는 유신과 민청학련, 전태일, 그 다음에 5·18과 6·10 등 여러 (역사적) 과정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내 삶을 바꾼 계기가) 하나만 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원래 사회의식, 공공의식이 아주 강했다. 그 사회의식을 내 실천과 등치시키는 성향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상당히 부자유스러운 독재체제에서 희생의 선봉이 됐다. 툭하면 희생을 많이 당했던 게 사실이다. 그 다음에 민주화되고 나니 그게 오히려 사회적으로 볼 때 계급장이 될 수도 있다. 그 뒤로 중요한 것은 공인으로서 공익을 위해서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성실하게 일해왔다.
국회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을 성실하게 한 것이 나름대로 평가받아 도지사가 됐다고 생각한다. 내가 특별히 잘생긴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지역토박이도 아니다. 부천 소사구에서 연거푸 재선 한 사람이 없는데 나는 (내리) 3선을 했다. 최고 득표율도 올렸다.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정직하게, 겸손하게 했다는 것 외에 내가 내세울 게 없다."
- 제가 보기에 88년 10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이후 가장 큰 변신은 '노동운동가'에서 '정당활동가'로 변신한 점일 것 같은데.
"맞다. 그때 고민이 많았다."
- 89년 대담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이렇게 정당활동으로 선회한 배경은?
"(감옥에서) 나와 보니 현장 노동운동을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 팽창을 했다. 내가 거기서 더 이상 기여할 게 없었다. 15년 이상의 대선배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서 그 후배들을 도와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중당을 했는데 실패했다. 다시 노동인권회관 소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치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있어서 민자당에 입당했다. 국회에 들어간 이후 6년 동안 환경노동위에서 일했다. 6년 연속 환경노동위에서 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 민중당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그때는 워낙 기반도 약했지만 우리도 정치가 뭔지 몰랐다. 투쟁만 알았지. 정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투쟁하는 식으로 정치를 했다.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 정치를 몰랐던 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인가?
"요즘은 '민주노동당' 하면 국민들이 알지만, 그때는 우리도 정치를 모르고, 사람들도 우리를 몰랐다. 당시에는 정당 하면 민주당이나 민자당이지 제3정당이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 94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소사 조직책에 임명됐다. 당시 참여개혁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민자당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가 있었나?
"첫번째 이유는 제안이 민자당에서 왔다는 점이다. 그때 민주당에서 (입당 제안이) 왔다면 (민주당에 입당)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민중당만 했다. 정당을 하더라도 기성정당과 다른, 진보정당 외에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의 해산과정을 거치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점진적 민주주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급진적인 변혁이 혁명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좌절이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사회주의권 몰락도 겹쳤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개인적인 진보정당의 실패…. 우리는 당시 YS의 개혁드라이브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았다."
- 당시 재야 쪽에서는 "노동형제를 버린 배신자"니 "변절자" 하는 비판이 쏟아졌고, 민자당 내부에서도 "우리 당이 빨갱이를 영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심정이 어땠나?
"요즘에는 그게 덜 이상하지만 나도 굉장히 갈등이 많았다. 민자당에 입당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과 토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였다고 하겠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연옥의 고통을 겪었다. 잠 못이루는 밤이 많았다. 이후에도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나는 정치를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생각했다"
- "연옥의 고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힘들었던 것인가?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하지만 운동하듯이, 수도를 하듯이 했다. 특별히 방탕한 생활도 안한 것도 그런 에너지가 크게 작용했다. 보통 정치권에 가면 흥청망청하고 기름기도 좀 끼고, 골프채도 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정치를 이렇게 해보지 않았다. (나와 그런 사람들의) 정치입문과정이 다르다. 나는 정치를 하나의 운동과정, 삶에 대한 헌신으로 생각했다."
- 그런데 아직도 '변절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나?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좀 있다. 그들은 나를 (여전히) 그렇게 본다."
- 민중당 시절 '구국의 결단'이라는 '3당합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민자당 입당은 결국 3당합당을 인정해주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내가 지금 내세우는 가치는 건국세력과 근대화세력, 민주화세력의 통합을 통해 선진화, 세계화 과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떨칠 수 있다. 대통합의 정치, 대통합론, 대수도론도 다 그런 맥락이다. 지역·계층·이념의 대통합을 통해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 94년 민자당 입당은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하나?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잘했다고 했다. 그걸 후회한 적이 없다. 진짜 잘하기 위해서는 뭔가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선진국까지 진입시키고 선진대열에서 추락시키지 않도록 하는 게 내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