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미끄러운데 설악산에는 왜 가는 거여?

네 중늙은이의 눈덮인 설악산 오르기 1

등록 2007.01.08 00:23수정 2007.07.0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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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과 푸름과 백설. 용대리에서 보는 내설악
단풍과 푸름과 백설. 용대리에서 보는 내설악제정길
시중에 떠도는 우스개로 이글을 시작해 볼까 한다.

한 연세 드신 분이 아내를 잃고 아들 내외에 얹혀(?) 살고 있었다. 아들이 출근하고 난 뒤, 며느리와 단둘이 집에 있는 게 민망하고 또 몸이라도 아프면 그 또한 자식에게 폐를 끼치는 게 될 것 같아, 이런 저런 사유로 틈만 나면 산을 다녔다. 그날도 아침을 느지막이 들고 배낭을 챙겨 며느리에게 '다녀오마' 하고 집을 나서는데, 그날따라 며느리의 심사가 좀 편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시아버지가 현관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리게 되었다.


"얼마나 더 사시고 싶어 저럴까, 매일 같이 산행이니."


@BRI@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의 산이란 산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주중에는 젊은 백수와 '늘근('늙은'의 고어) 백수'가 산중으로 '할 거리'를 찾아 나서고, 주말에는 일에 지친 피로한 백성들이 '쉴 거리'를 찾아 이산 저산을 헤맨다. 이런 유행(?)을 따름인지 환갑 진갑을 다 지난 네 '늘근 백수'가 신년 들어 설악산을 올라 보기로 작정을 하였다.

전날 내린 강원지방의 대설 주의보가 해제도 되기 전인 새벽 6시, 서울을 출발한 네 중늙은이를 실은 차는 아침 8시30분에 인제군 용대리에 도착하였다. 눈은 그쳐 있었고 적설량은 예상보다 적었다. 주차장이 넓은 식당에 들러 황태국밥으로 빈속을 채운 뒤, 차를 맡겨두고 설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월 초순의 겨울치고 날씨는 포근하였으나, 눈이 깔린 길이 미끄러워 초입부터 아이젠을 차야했다. 주중이라 그런지, 대설 주의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등산객이 드물었다. 다만 아이들 한 무리가 눈을 뭉쳐 서로 던져고 깔깔거리며 등산로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렴동 계곡까지 간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린 것은 예뻐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디엔에이(DNA)가 오랜 진화과정을 통하여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다행한 일이다. 인구가 준다고 아우성을 치는 마당에 만약 어린 것이 예뻐 보이지 않는다면 인구의 감소는 더욱 급격해지지 않겠는가.

용대리의 옛 다리
용대리의 옛 다리제정길

눈 덮힌 내설악 백담사 일주문
눈 덮힌 내설악 백담사 일주문제정길
11시, 백담사 앞에서 한숨을 돌렸다. 내설악 백담사라 쓰인 일주문은 머리에 하얀 눈을 쓰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는데, 웬일인지 백담사에 만해 선생은 아니 계시고 머리 반짝이는 어느 정치군인이 여직 앉아 있는 것 같아 들어가 보기가 싫었다. 내쳐 길을 나서니 백담계곡의 물은 반 넘어 얼어있고 그 위에 눈이 덮여 황은색의 괴석과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었다. 그 아래 졸졸거리는 물소리는 세속의 옹졸한 생각을 버리라고 우리를 달래는 것 같다.


눈과 얼음과 물 (백담계곡)
눈과 얼음과 물 (백담계곡)제정길
산으로 들어갈수록 눈도 깊어져 이제 발목을 지나 종아리까지 찬다. 인적은 괴괴하고 사방은 고요하여 앞에 가는 친구의 헉 헉 대는 숨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깝다. 때때로 사람소리에 놀란 산새, 퍼덕이며 날아간 나뭇가지에서 눈 떨어져 '늘근 백수'의 목덜미를 간질인다. 좋구나. 비록 벌써 허리 뻐근하고 가슴이 풀무 짓하듯 쿵쾅거리지만, 좋구나. 이렇게 좋으니 딴 소리를 듣더라도 오지 않을 수가 없을 수밖에.

눈 쌓인 백담계곡을 차 오르는 '늘근이들'
눈 쌓인 백담계곡을 차 오르는 '늘근이들'제정길
영시암을 거쳐 수렴동 계곡으로 접어드니 산은 점점 깊어지고 눈도 덩달아 깊어져, 길은 종내 없어지고 앞 사람의 발자국만 희미하게 눈 속에 남아 있을 뿐. 헌 발자국위에 새 발자국을 포개며 앞선 자의 흔적을 쫒아가다 보니 시계는 어느 듯 오후 1시 30분. 어차피 앉아서 편하게 밥 먹기는 글렀고 눈밭에 서서 주먹밥을 꺼내 먹는다.


반찬이 없어 밥이 목에 걸리지만 멀리 눈 덮인 산등성이의 웅장한 모습이며 계곡의 잘 생긴 바위위로 솥뚜껑을 덮듯 타고 앉은 눈이며, 눈의 무게에 짓눌려 휘 늘어진 나뭇가지까지 훌륭한 반찬이 되어 우리의 위를 행복하게 했다. 금강산은 밥 먹은 후에 본다지만(金剛山 食後景) 설악은 식사 중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이.

선채로 식사를 (주먹밥도 눈밭에서 먹으니 별밀세 그려)
선채로 식사를 (주먹밥도 눈밭에서 먹으니 별밀세 그려)광암 김재부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서니 산은 급격하게 가팔라지고 눈은 무릎보다 더 높이 싸여 있어, 등산스틱을 조금만 어긋나게 짚으면 손잡이까지 눈 속에 파묻히는 지경이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가다 오랜만에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 눈밭 속에 중년의 여인 둘이 아무런 장구도 없이, 배낭도, 하다못해 물통 하나 없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속도가 조금 느리기는 하였으나 힘든 기색도 전혀 없이 마치 동네 마실 가듯 유유자적 산길을 즐기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봉정암에 가시는 보살인 듯 하였다.

봉정암을 향한 마지막 깔딱고개를 오르는 '상무'
봉정암을 향한 마지막 깔딱고개를 오르는 '상무'제정길
무엇이 저 사람들을 이 눈길 속에 나서게 하였을까. 우스개 속의 늙은이처럼 며느리가 있을 나이도 아닌데, 저 여인들은 무엇을 구하러 이 눈밭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일까? 나는, 또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무엇을 버리고자 이 가파른 눈밭 속을 헤매는 것일까? 이 나이에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다는 자기 만족감을 위함일까. 아직 육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 해보고자 함일까. 아니면 고통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 보자 함일까.

모를래라. 하수(下手)는 장고할수록 악수만 둔다니까 생각을 이쯤에서 끊어버리는 게 그 또한 좋은 일. 누구 말대로 그냥 산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겠지. 산은 더욱 가파르고 숨소리 또한 가파르다. <2편으로 이어짐>
#내설악 #설악 #산행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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