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군악대가 1904년 5월 6일 창덕궁에서 열린 '러일전쟁 승전 기념식'(공식 행사명은 '황군 전승 축하회')에서 연주하는 모습. 고종을 비롯해 내각 대신들까지 참석했다. 행사 직전, 일본군은 만주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압록강 너머에 있는 구연성을 점령했다(1904.5.1). <러일전쟁사진화보>에 게재된 사진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건 처음이다.<러일전쟁사진화보>
1904년 5월 6일 오전, 창덕궁 주합루 앞마당에서 트럼펫과 바순 등 서양 악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또한 주합루 중앙에 대한제국기와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고종과 이완용을 비롯한 내각대신들, 그리고 수백명의 일본군 장교들까지 모여 '러일전쟁 전승 기념식(공식 행사명 '황군 전승 축하회')'을 거행했다.
이날 음악을 연주한 사람들은 군복 차림의 대한제국 군인들로 구성된 군악대였다. 당시 영국 언론에서는 대한제국의 군악대를 두고 "조선인은 음악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날의 음악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울려퍼진, 자랑스럽지 못한 연주였다.
여기서 조선군악대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1900년, 조선 군악대 탄생
@BRI@1896년 5월 20일 민영환 당시 조선국 전권대사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 때 러시아 군악대를 본 민영환은 조선에도 이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민영환은 고종에게 "러시아 군악대와 같은 것을 조선에도 만들어야 한다"고 간청해 허락을 받았다. 군악대는 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59호로 설치됐다.
당시 군악대는 시위연대와 시위기병대에 각각 2개대로 편성됐다. 1902년 편성된 군악대는 1등 군악장(대장) 1명, 2등 군악장(부장·하사급) 1명, 1등 군악수(악사·부하사관) 3명, 2등 군악수(상등병) 6명, 악사 27명, 악공(연주자) 12명, 서기 1명 등 총 51명으로 구성됐다.
1901년 2월 1일, 고종은 군악대 발전을 위해 독일인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를 시위 군악대 교사로 3년간 고용했다. 에케르트는 1902년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일제는 1910년 이 노래를 금지했지만,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를 애국가로 불렀다.
초기 군악대를 이끈 사람은 김학수와 백우용이었다.
김학수는 대한제국 군대 창설시 시위연대 참위(위관급)였으며, 1902년 5월 16일 군악대 1등 군악장으로 임명됐다. 또한 1906년 군악대 경비 문제에서 잘못을 범해 15일 동안 근신할 때까지 군악대를 이끌었다. 반면 백우용은 1902년 육군 보병 참위로 군악대 3등 군악장으로 임명됐다. 김학수가 물러나면서 백우용은 1907년 3월 10일 군악대 1등 군악대장으로 승진했다. 특히 1905년 10월 14일 두 사람은 일본에게 훈5등서보장을 받았다.
'동양의 제일'로 영국·미국에 뒤지지 않았던 군악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