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영
원래 지난 일요일(10월 29일)에는 내 엄마 조 여사한테 가기로 했다. 같이 국화꽃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목요일 밤에 오지 말라고 전화하셨다. 꽃구경보다는 하루 일하는 게 더 중요한 조 여사다운 판단이었다. 나는 토요일에 순창 강천산으로 단풍놀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아이와 밤늦게까지 놀다 잠들었다.
일요일 오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동생 지현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가 동생이라도 혼자 왔으면 한다고 하셨단다. 괜히 동생보고 "조 여사는 왜 그래? 오랬다 오지 말랬다, 하튼 변덕이야" 하면서 집을 나섰다. 아이가 배고파할까봐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몇 번이나 집으로,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셨다.
엄마 집을 들어섰는데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당 가득, 소금에 절인 배추가 보였다. 그 옆에는 아직 다듬지 않은 갓과 무가 몇 다발씩 있었다.
"조 여사, 이게 다 뭐야?"
엄마 일터가 갑자기 이틀을 쉬게 됐다고 하셨다. 엄마는 홈쇼핑에 굴비를 납품하는 회사에서 굴비 엮는 일을 하신다. 그런데 전날, 프로야구 경기하고 굴비 파는 시간하고 겹쳐서 생각보다 굴비가 많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가 속한 생산 팀은 이틀 휴가를 받게 됐다.
엄마는 '황금연휴'를 김치 담그는 일에 쓰겠다는 계획을 급하게 세우셨다. 아빠 친구 분한테 부탁해서 트럭을 얻어 타고 가셔서 배추 100포기와 갓과 무를 사와서 소금에 절이고 계셨다.
"조 여사, 뭔 통이 이렇게 크요?"
"뭣이 커라우? 들어갈 입이 몇 갠디. 군산 딸네 둘, 서울 딸, 작은할머니네 집, 내 막뚱이 동생까지 줄라고 그런디."
"엄마. 휴가면 쉬어야지. 김장 김치도 아니고, 100포기가 말이 돼? 휴가 사흘 줬으면 조 여사네 9남매 김치에다 동네 사람들 김치까지 담그겠네?"
"아따~ 김치 담그는 것이 뭔 일이요? 한 포기나 두 포기나 다 똑같은디."
동네 사람 결혼식에 갔다 와서 정장 차림인 아빠는 옷도 갈아입지 못 하고, 마늘을 까고 계셨다. 나는 위생 모자까지 갖춰 쓰고 배추 절이는 일을 하고 있는 엄마 사진을 몇 컷 찍으면서 말했다.
"엄마, 해 떨어지기 전에 우리 갈 거야."
"김치가 그렇게 쉽게 되가니? 자고 가야제."
"가야 해. 내일 제규도 학교 가고, 나도 일해야지."
"(웃으시면서) 오메~ 나는 나 쉰다고, 다 쉰 줄 알았네, 잉."
"조 여사, 오늘은 나라에서 정한 법정 공휴일이고, 내일부터는 온 국민이 다 일하거든. 조 여사 쉬면, 딸이랑 손주도 자동으로 쉬는 줄 알어?"
"어찐디야? 아무리 빨리 해도, 김치 물 빼고 버무리믄 새벽인디. 천상 내일 아침에나 가야 쓰것다."
부엌으로 마당으로 종종 걸음을 치는 조 여사를 내다보면서 남편한테 '조 여사한테 낚였다. 낼 아침에 갈게' 문자를 보냈다. 생각해 보니까 혼인하고 10년 동안 엄마가 보내 준 김치를 먹고 살았으면서도 엄마가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