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아주버님과 형님 내외. 옥골선풍이던 사촌 아주버님도 힘든 농사일 하시느라 이리 변했습니다. 아주버님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합니다.이승숙
우리 둘은 비슷한 시기에 시집을 와서 하나하나 시집살이를 같이 배운 까닭에 은근하게 동지애 같은 것이 싹텄다. 그래서 나는 형님을 만나면 한 시대를 같이 산 동지 같은 기분이 든다.
형님은 우리 집안의 장손 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거기다가 고향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동네에 젊은 사람이라곤 형님밖에 없다보니 온갖 집안 대소사 일이 다 형님 몫이다. 시댁 동네엔 우리 일가친척들이 많기 때문에 형님은 처신하기도 쉽지 않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하며 산다.
명절에 시댁에 가면 나는 큰집으로 올라가서 제사 음식 만드는 걸 돕는다. 우리 어머님은 나더러 그러신다. “야야 큰 아야, 다른 며느리들은 몬 올라가도 니는 올라가거라. 올라가서 너거 형님 도와드리거라.”
우리 시아버님은 형제간 중 맨 막내시다. 그래서 우리 집엔 제사가 없지만, 큰집엔 3대 봉제사를 해야 할 만큼 일이 많다. 나와 우리 동서들은 제사가 없어서 명절이라도 힘들 일이 없지만 큰집 사촌 형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형님에게도 친동서가 있지만, 그 동서는 나이도 어리고 또 바빠서 명절 전날 밤늦게 내려올 때가 많다. 그러니 제사 음식 장만은 늘 형님 혼자 하게 되고, 손님 치다꺼리도 형님 일이다.
내가 큰집에 올라가서 형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제사 음식을 장만하다보면 형님은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던 속상하고 답답한 이야기들을 나에게는 가끔 털어 놓는다. “동서야, 나는 동서가 내 친동서보다 더 만만타. 동서는 이물 없고 편하다.”
촌에서 농사지으며 살자니 오죽 힘들겠는가. 게다가 동네에 젊은 사람이 없으니 같이 놀 사람도 없고, 또 전부 다 집안 어른들뿐이니 처신이나 언행에 얼마나 조심하며 살아야 했을까.
형님은 시집 올 때 인물이 고와서 집안 시동생들이 다들 ‘형수 곱다’며 칭찬했다. 그러나 세월은 형님을 건너가지 않았다. 힘든 농사일에 그 고운 얼굴이 검게 탔고 야리야리하던 몸매는 살이 올라서 퉁퉁해졌다.
낮에 나는 내가 잘 이용하는 재활용 매장에 가서 형님 옷을 한 벌 샀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는 안 된다며, 치마 사더라도 무릎 가려주는 길이로 사라고 했던 형님 말을 떠올리며 옷을 골랐다. 마침 알맞은 옷이 있었다. 점잖으면서도 품격 있어 보이는 옷이었다. 촌에서 농사짓는 형님이 입어도 얼마든지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옷이었다.
옷을 입어보는 나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다 한 마디씩 했다. “아이고 그 옷 어디서 찾았지? 옷도 잘 찾는다. 아래위로 맞춤이네, 맞춤. 가을에 어디 점잖은 자리 갈 때 입으면 좋겠다. 예쁘다, 무조건 사라.” “예뻐요? 이 옷 우리 사촌 형님 줄 건데 괜찮죠?” “아니 자기 옷도 아니고 형님 줄려고 옷을 산단 말이야? 친 동서보다 다 낫네. 옷도 다 사주고 말이야.”
옷을 드라이해서 새 옷으로 만들어야겠다. 곱게 포장해서 형님한테 보내 드려야겠다. 내가 보내주는 옷을 받고 형님은 어떤 생각을 할까? 아무것도 모르던 새댁 시절을 떠올릴까?
갑자기 형님이 보고 싶어진다. <전원일기>의 ‘일용이 마누라’ 같은 우리 형님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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