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세상을 떠나기전 펴냈던 사진에세이 <그섬에 내가 있었네>. 대중에게 사진가 김영갑의 존재를 알린 책이었으나 당시 그는 카메라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있었다.휴먼앤북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도록 신이 그에게 형벌을 내린 것은 아마 그가 순교자의 길을 자청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신은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쥐어짜는 예술가를 가만 두지 않는 모양이다. <그섬에> 말미에 안성수 교수는 이렇게 썼다.
"'사진을 찍다가 순교하겠다, 여한 없이 사진을 찍다가 웃으며 죽고 싶다'던 그가 5년째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다. …(중략)…돈도, 명예도, 가족도, 결혼도, 자기의 육신까지도 내팽개친 채 사진만을 꿈꾸며 살아온 그의 삶은 투철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현란한 유혹의 길을 살면서도 그는 자기 예술을 위해 가난한 순교자의 길을 자청했다."
<김영갑 1957~2005>에 실린 사진들을 보며 제주에 홀린 그의 생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름의 억새밭 속에서 제주의 바람을 필름에 담기 위해 삼각대에 카메라를 받쳐두고 느린 셔터를 누르는 그의 모습. 바짓가랑이에 잔뜩 이슬을 묻히고 푸른 보리밭 사이를 카메라를 들고 누비는 그의 모습. 한라산 너머로 붉게 넘어가는 황혼을 파인더로 바라보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반추하며 눈물 훔쳤을 그의 모습.
"이 땅에 그런 사진가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그가 <그섬에>를 펴내긴 했지만, 그것은 '사진집'이 아닌 '사진에세이'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진집'을 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진집을 넘기면서도 그의 존재가 아쉽다.
사진집 첫머리에 실려 있는 사진평론가 진동선씨의 글 중에서 '작가는 죽어서 평가받는다는 미술사의 오랜 진리'라는 문장이 가슴에 박힌다. 진동선씨의 글이다.
"이 땅에 그런 사진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고 싶다. 사후 일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되는 사진집의 의의는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아니 작가는 생의 존재 이유를 작품집에서 찾는다. 이 사진집이 김영갑이라는 사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또 그가 걸어온 지난 20년 사진 세계를 바라보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잃어버린 그의 절반의 행복을 되찾아주는 일이거니와 작가는 죽어서 평가받는다는 미술사의 오랜 진리를 복원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사진집 말미에 루게릭병에 걸리기 전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 꽉 다문 입술…. 시퍼렇게 날이 선 고독한 사진가의 모습이다.
다시 사진집의 첫머리로 넘어간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야윈 얼굴이 담겨있다. 모든 욕심을 바람에 실어날리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사진 작업을 하지 못한 5년 동안 가장 선명하게 떠올랐다던 '둔지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김영갑
그는 제주의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사진집엔 제주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바람, 들판, 오름, 구름….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제주는 '변덕'스럽고, '오묘'하고, '아름'답고, '황홀'하다. 그는 아마 제주를 잊지 못해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떠난 지 1년, 다시 한 번 진정한 사진가였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사진집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그의 '사진론'을 옮겨본다.
"사진을 계속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살아있음에 끝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나의 사진 속에는 비틀거리며 흘려보낸 내 젊음의 흔적들이 비늘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좌절, 분노…. 내 사진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 | 그 섬에 그는 흙으로, 풀로, 바람으로 돌아왔네 | | | 사진집 '작가소개'를 통해 봄 사진가 김영갑 | | | |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이래 20여 년 동안 사진가 김영갑은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그 곳에 매혹되어 1985년부터 아예 섬에 정착했다.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 섬 곳곳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밥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 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친 것이었다.
그는 창고에 쌓여 곰팡이꽃을 피우는 사진들을 위해 갤러리를 마련하려고 버려진 초등학교를 구하고 초석을 다졌다. 그 무렵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없이 허리에 통증이 온 것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손수 몸을 움직여 사진 갤러리 만들기에 열중했다. 이렇게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2002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 갤러리에서 잠들었고, 그의 뼈는 두모악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 | | | |
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다빈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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