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으로 본 슬픈 자화상

[서평] 공선옥의 <유랑가족>을 읽고 나서

등록 2006.04.11 17:36수정 2006.04.1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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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죄인처럼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안전은 물론이거니와 인격도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 '작가의 말'에서

a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공선옥의 <유랑가족>. 벌써 나온 지 1년이 지난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올해의 예술축제'의 전주 공연('문학의 무대 예술')을 보고나서였다. 그때 작가와 함께 하는 대화 도중에 사회자인 소설가 한창훈은 "가난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작가"라고 공선옥을 평하기도 했다.


그때 공연장에서도 그 후 책을 읽으면서도, 대한민국 사람 중 700만 명이 빈곤층이라는 현실 앞에서 의외로 가난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과 그 중 나도 엄연히 포함되어 있다는 건 꽤나 부끄럽고 때늦은 자각이었다.

가난이 죄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걸 남 앞에서 '실토'하거나 '낙인' 찍히는 것을 창피해 하는 세태는, 가난함 그 자체만큼이나 비극적이다. 분명 주변의 산재한 가난을 외면하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그 문제가 없어지거나 해결되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난의 화두를 기피하는 사회의 분위기란!

풍경 하나

다음달 태양건설 사외보 메인 꼭지에는 남도 산골의 아늑한 겨울 풍경이 오롯이 담긴 사진과 글이 실리게 될 것이다. 자신이 끓여준 라면을 먹으며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거기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컴퓨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아이들과 학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남도의 겨울 정취'여야만 하니까. (53쪽)

설 준비하는 흉내를 내라는데 솥에 넣고 끓일 것이 없어서 물이라도 붓고 불을 땠더니, 불 때는 것이 무슨 구경거리라고 또 사진을 박았다. 당최 사진 찍는 것도 싫고 해서 마당에 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더니 젊은 처자가, "할머니 표정 끝내주네요"하던 것이 하마 제 늙은 낯짝 이쁘다는 소리는 아니었겠지만, 처자가 아궁이 위에 모셔둔 조왕신 단지를 주워들고는 이쁘다고, 꽃병 하면 좋겠다고 하면서 저 달라고 하는 말에 얼른 그러라고 해버린 것은 자식도 안 찾아오는 집을 찾아와준 것이 고마워서였는가. (214쪽)



잡지와 방송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 속에서, 이곳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고단한 삶을 미루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호들갑 떨며 마이크를 들이대는 리포터의 과장된 감탄사 속에는 노인네의 '싸구려'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이를 보며 한참을 헤죽대다가 '개발의 그늘, 양극화'라는 시사 프로그램이 나오자 스포츠 채널로 화면을 돌리는 사람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풍경 둘


한이 술을 마시는 동안, 술을 마시면서 '우국충정'을 하는 동안 영주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낯선 도시의 15층 아파트에서, 이제 저를 제 피붙이에게 데려다주겠다던 사람은 저하고는 상관없이, 저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 술을 마시고, 저는 못 알아듣는 말로 악을 쓸 때, 영주는 슬프고 고통스러웠을까. 영주는 제가 먼저 나옴으로써 한을 깨운 것이다. 제 힘으로는 어디로든 갈 줄 모르고 갈 수도 없어서, 영주는 한을 기다리며, 저를 데려다줄 한의 자동차 옆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꼭 숙취 때문이라기보다는 '목구멍이 포도청인 민중'을 말하다 '갈 곳 없는 영주'를 잃을 뻔한 것 같아 한은 영 입맛이 쓰다. (182쪽)

맨 정신에는 세상에 이죽거리던 이들이 술을 마시고는 진보를 말하고, 지난 80~90년대 민주화 투쟁을 말하고, 이 땅 민중들의 고통을 말한다. 하지만 악다구니 물고 침을 튀기며 하는 그네들의 중구난방한 말에, 그 누구도 결코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에, 갈 곳 없어 벼랑 끝에 서 있는 가난한 이들은 결코 오지 않을 희망을 기다리며 지쳐 잠이 든다.

풍경 셋

초점 잃고 끼득거리는 인숙의 등에서 연순의 아기 윤경은 하염없이 방실거린다. 그들은 그들이 예전에 살던 뚝방 동네를 뒤로하고 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차도를 지나고 공터를 지나고 고물상을 지나고 개천을 지나고 논둑을 지나서 그들은 갔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는 뜨겁다. (152~153쪽)

이제 영주와 영주 할머니 김유분 노인이 살던 집은, 그 독가촌 블록집은 바람에 삭고 햇빛에 바래지다가 어느 한 날, 조용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176쪽)

미루나무가 있던 자리, 애기똥풀이 있던 자리를 아스팔트로 뒤덮어버리면 나무고 풀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후에 사람들은 그곳에 미루나무가 있었고 애기똥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릴 것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116쪽)


그냥 살다가 그냥 소멸되는 게 인생이다. 고생만 하다가 덧없이 가는 게 인생이다. 그다지 선량하지만도 않은, 얽히고설킨 애증의 관계 속에서 부대끼는 우리 민중들의 인생이다. 친환경 개발이든 뭐든 극히 소수에게만 득이 될 뿐, '새만금 방조제'의 어민들은 이제 곧 또 다른 유랑 생활을 찾아 떠날 것이다.

<유랑가족>은 작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작이다. 이 시상의 상금은 복권 기금에서 나온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소설은 이 서평만큼 그리 우울하지 않습니다. 책을 붙잡고 한참을 웃을 만한 대목도 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소설은 이 서평만큼 그리 우울하지 않습니다. 책을 붙잡고 한참을 웃을 만한 대목도 꽤 있습니다.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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