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원 50주기 보도한 <한국일보> 1983년 3월 15일치 기사한국일보
1973년 한국여성항공협회는 일본부인항공협회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리고 김경오 회장을 중심으로 박경원의 추락사 지점을 찾아 첫 제사를 지냈다. 1975년 여성항공협회는 앞면에 박경원 얼굴, 뒷면에 '한국여류비행계의 개척자'라고 새긴 메달을 제정했다. 1983년 <한국일보>는 박경원 50주기를 맞아 문제의 일장기 사진까지 게재한 기사로 박경원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했다. '일만 비행'도 조국의 하늘을 날기 위해 분투한 여류 비행사의 참모습을 가리지 못했다. 그것을 친일로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당시 일제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이 아닐까.
정혜주 기자는 친일과 관련해 '고려 신사 참배'도 거론했다. 일제가 강점기에 비록 내선일체에 이용하긴 했지만 고려 신사는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인 시조를 모시는 신사다. 친일파로 공인된 동명이인 '박경원 남작'을 박경원으로 착각하는 것도 모자라 최근의 일부 여론은 고려 신사를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로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성격이 다른 맥락에서 쓰였던 사진을 빌려다 친일의 증거로 쓴 정혜주 기자의 잘못은 김정동 교수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중앙일보> 12월 26일치 기사 '일장기 들고 비행기 탄 박경원은 친일파?').
'최초' 논란 - 누가 조국의 하늘을 또 찢으려 하는가
이미 박경원과 권기옥은 각각 다른 의의에서 우리 나라 최초 여류 비행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기준과 수식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지만 두 사람 모두 최초의 여류 비행사라는 데는 어떤 적대도 없다. 권기옥도 독립군 공군 조종사로서 복무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중국 공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인민 어느 누구도 일본인이고 싶지 않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불행하게도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그렇게 따진다면 대한민국의 자격증으로 그리고 국적기로 하늘을 난 최초의 여류 비행사는 김경오이다. '최초'는 계속 이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과 중국 국민군 제1비행대 소속의 권기옥에 이어 세 번째로 비행사 자격증을 소지한 이정희가 1949년 1월 10일 입대와 동시에 중위로 임관해 공군 최초의 여군이 되었다." - <국방여군> 창간호, 국방부 여군발전단, 2003년
| | | 권기옥이 중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 | | | 최초 논란과 관련해 박경원의 폄훼가 아니라,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중국의 자료가 어떤 부가 설명도 없이 버젓이 중국 항공사 연보에서 권기옥을 ‘중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오기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쪽 자료와 윈난 항공학교 졸업 연도도 다르다. 더 자세한 연구와 규명이 필요하며, '중국 최초'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해방이 되어 주권을 찾은지 반 세기가 훨씬 넘은 시점에서 권기옥이 한국인이라는 추가 설명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민국15년(1926년) 7월 권기옥이 윈난 항공학교 비행과를 제1기로 졸업하여 중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됨(民國15年(1926年) 7月 權基玉在雲南航空學校第一期飛行科畢業, 成為中國第一位女飛行員)”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2004년 6월 2일치 인터넷판) / 홍대욱 | | | | |
위와 같은 자료도 있지만 도무지 최초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부끄러운 것은 최초 논란이 권기옥과 박경원이 아닌 '지금 우리'의 다툼이라는 점이다. 만약 권기옥과 박경원이 함께 해방을 맞았다면 과연 최초를 다투었을까? 그렇게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해방된 바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장덕창, 서웅성 등 비행사들은 독립투사와 민간 비행사, 출신지와 중국, 일본 등 활동 지역을 막론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단결을 결의했다. 1946년 5월 24일 최용덕, 이영무 등 남성 비행사를 비롯하여 권기옥, 이정희 등 200여 명의 항공계 인사들은 한국항공건설협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비행사들은 조국의 하늘을 마음놓고 날 수 없었다. 미군정은 남한 전역에서 미군기를 제외한 모든 항공기의 운항을 금지했다. 그리고 해방 공간을 최초로 날아 보려고 대구에서 두 비행사가 수송기를 띄운 일을 빌미로 비행기를 모두 파괴해 식기 재료로 불하했다. 그리고 모진 세월 끝에 같은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든 항공인들의 모임을 '친일' 준군사조직으로 간주해 해산해 버렸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하늘은 전쟁과 분단으로 찢어졌다.
최근 우리와 비슷한 분단의 아픔을 지닌 양안의 하늘이 조금이나마 봉합되는 부러운 장면이 눈에 띈다. 영화감독 첸가이거와 국민당 조종사였다가 대만 공군이 된 그의 외삼촌은 눈물의 상봉을 했다. 그리고 대만 공군 출신 조종사 8명이 중국 항공사에서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양안의 하늘은 저렇게라도 합쳐지는데 우리의 분단된 하늘이 새삼 또 다시 친일과 최초 논란으로 찢어지는 모습은 정말 씁쓸하다.
권기옥과 박경원, 그리고 영화 <청연>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들을 지켜보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 권기옥도 영화로 만들자. <청연>이 축적한 항공 촬영 역량과 <태극기 휘날리며>가 축적한 전쟁신 연출 역량 등을 바탕으로 중국 대륙과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한 여성 투사의 삶을 그린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뜻있는 영화인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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