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질을 통해 '정의당한' 나

고교시절의 두발단속이 내게 남긴 것

등록 2005.06.05 13:55수정 2005.06.0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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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기르겠다는 일념으로 입학한 학교


나는 두상이 그다지 잘 생긴 편이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지저분하게 장발을 할지언정 절대로 짧게 깎지는 않는다. 주위사람들이 짧은 머리모양으로 한 번 바꿔 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내 머리스타일은 군생활 2년 반 동안을 제외하고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내내 그대로다.

내 고향 P시에는 인문계 고교 중 공립학교가 딱 한 군데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학교에서 유일하게 두발자유를 허용했다. 아니, 적어도 중학교 3학년 당시의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에 비치던, 못생긴 내 두상을 3년씩이나 바라보는 데 신물이 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피터지는 중3을 보낸 결과 마침내 입학시험(P시는 비평준화 지역이다)에 합격했고, 그때부터 바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학교 졸업사진 속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탄압

입학 후에도 1학기까지는 마음 편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동안 억눌렸던 자유를 일제히 분출하려는지, 나를 비롯한 신입생들은 '무조건 길면 먹어준다'는 모토 아래 앞다투어 앞머리 길이 경쟁을 했다. 교사들도 월례행사처럼 "두발 정리를 하라"는 공지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 머리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들린 적은 없었다.

헌데 2학기 말이 되니 상황이 달라졌다. 두발 단속을 예고하는 공지가 훨씬 더 잦아지면서 슬슬 겁을 집어먹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과연 정말 단속이 뜰까'에 대해 삼삼오오 모여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아예 속 편하게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 앞머리만 짧게 잘라 교묘히 단속을 피하는 아이들, '소신껏' 끝까지 버티는 아이들 등 다양한 부류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어느 날, 모든 교실에는 난데없이 '가위바람'이 불어닥쳤다. 단속의 피해자가 된 아이들은 마치 터진 지뢰밭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구내 이발소나 근처 미용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 때 내 머리카락은 단속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그러나 행운은 두 번 오지 않았다. 이듬해 봄, 완전 무방비 상태로 야간자습을 하고 있던 나는 결국 단속에 보기좋게 당해버렸고, 그 해 겨울 다시 한 번 차가운 가위의 감촉을 뒷머리에 느껴야만 했다. 처음에는 분함과 수치심에 한참을 씩씩거렸지만, 두 번째부터는 대담무쌍해져서 잘린 머리가 복구될 때까지 아예 손질도 하지 않고 그냥 다녔다. 그 한 해 동안, 내 머리는 무려 3번씩이나 폭격을 당했다.


그처럼 계속 단속당하는 동안, 나는 단순히 맹목적 불쾌감에 휩싸여 단속교사들을 욕하는 데서 벗어나 '어째서 단속이 잘못되었는지'를 규명해 보고 싶었다.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부당함을 극복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했던 내가 품게 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최초의 회의였고 비판이었다.

당시 발간된 우리 학교 교지에는 두발단속과 관련하여 내가 기고한 글이 실려 있다. 문장도 조잡하고 논리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글이었으나, 나로서는 그처럼 권력에 대한 비판의 기본적인 요소들 - 흑백논리의 정당화, 자의적 기준의 절대진리화, 억압적 수단의 사용 등에 대한 비판 - 이 포함된 글을 써 보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교지 제작을 담당하셨던 국어선생님께서는 수업 중 내 글을 거론하시면서, 참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물론 단속하는 측에서는 즉각 교지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두발단속을 담당했던 학생주임 선생 왈, "여러분이 나를 아무리 욕할지라도, 나는 내 행동에 대해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치 구국의 결단이라도 내린 듯 엄숙한 말투였지만, 그 엄숙함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했음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누가 누구를 규정할 수 있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물론 졸업 후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리를 길렀다. 하지만 그 때 우리를 탄압했던 두발단속의 권력은 아직도 꼬리를 내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의 후배들은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을 통해 결국 두발문제를 공공의 이슈로까지 부각하고야 말았다. 아낌없는 격려를 주고 싶다.

두발단속의 이유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 없다. '학생다운 머리'에 대한 어른들만의 자의적인 잣대, 그리고 학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없는 이유로 어른들은 아직도 아이들에게 가위를 들이댄다. '대학만 가면 원없이 머리를 기를 수 있다. 조금만 참아라'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아직도 늘어놓는다.

그러나 아이들의 미래까지 담보해야 할 만큼 두발문제가 그렇게나 절박한 이슈던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이야기가 아닌가. 실상은 '학생다움'에 대한 자신들의 기준을 포기하기 싫다는 의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른들의 고집치고는 꽤나 유치하다. 차라리 이유를 대지 않는 편이 나을는지도.

교사들은 두려운 것일까, 귀찮은 것일까. 자신들이 세운 기준이 깨지는 것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그 기준이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납득하는 것이 귀찮은 걸까. 부디 자신에게 이 질문 하나만큼은 던져봐 주시길 부탁 드린다. 스스로 과연 타인을 정의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머리모양이 그를 정의할 수 있는지를. 굳이 '학생들의 인권'이라는 거창한 문제를 걸고 넘어지기에 앞서, 두발문제는 '학생이기 이전에 타인'인 누군가를 보는 시각과 관련된, 인간관계의 극히 기본적인 측면에서의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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