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고려대에서 어윤대 총장(왼쪽)이 앞 선 가운데 이건희 회장이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인촌기념관으로 들어가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이건희 회장의 고대 사건은 재벌권력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학교당국은 물론 언론, 심지어 정부까지 '물리적 시위'라는 외형적 측면에 치우쳐 학생들에 대한 질타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반면 본질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적 측면은 거의 조명되지 않고 있다. 바로 '학생들이 이 회장의 학위 수여에 반대한 논거는 무엇이며, 또 그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가'에 관한 문제이다.
학생들은 삼성의 노동탄압에 책임이 있는 이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집단 교섭권 인정은 선진사회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이다. 하지만 세계 초일류기업을 추구한다는 삼성은 지금까지 무노조경영을 표방하며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아왔다.
삼성의 노사가 자율적 합의에 의해 무노조를 한다면 굳이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삼성SDI의 휴대폰 위치추적 의혹이나 끊이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미행·납치 시비는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사회가 학생들에 대한 비판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한국 제1의 재벌인 삼성의 비위 맞추기라는 분석이 많다. 고려대 보직 교수들의 동반 사퇴나 관련 학생들에 대한 징계 방침이 대표적이다.
일부 보수언론들은 '탈선'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학생들을 공격했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진대제 정통부 장관은 "노조 없이 잘하는 기업도 있다"며 잠시 자신의 자리를 잊은듯한 발언까지 했다. 고대 학생회가 관련 학생들에 대한 징계방침에 반대하자, 일부 학생들이 학생회에 대한 성토에 나선 것을 두고, 삼성에 취업하는 데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농반 진반'의 얘기까지 들린다.
실제 삼성 안에서도 고대 출신 직원들이 "나는 서울 본교가 아니라 조치원 분교를 졸업했다"고 말한다는 게 흘러나올 정도로 미묘한 분위기이다. 모두들 이건희 회장의 심기를 살피며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들이다. 누구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정말 장난이 아닌 시대가 됐다고도 한다.
대상그룹 명예회장 비자금 수사 중단의 의미, '자본의 시녀' 검찰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이 위장계열사를 통해 수십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개인적으로 사용한 게 법원 판결로 드러났음에도 검찰이 수사를 중단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제 검찰조차 재벌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5대 재벌 부당내부거래 배임죄 고발과, 삼성SDI 노동자 휴대폰을 통한 위치 추적 고발, 삼성생명 등 삼성 계열사들의 총수자녀 부당지원 등 배임죄 고발에 대한 검찰의 무더기 무혐의 처리에 대해서도 검찰이 자본의 시녀로 전락했다고 비판이 쏟아졌다.
재벌 봐주기 논란은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들에 대한 검찰 수사나 법원의 판결 과정에서도 제기됐다. 수백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중죄인임에도 대부분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고, 법원의 판결도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당시 명분은 역시 국민경제를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향후 2년간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증권집단소송제 적용을 면제해주고, 기업의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보고서가 제대로 작성됐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감리까지 사실상 하지 않겠다는 정부방침도 경제와 기업에 충격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게 이유였다. 삼성 계열사의 공정거래위원회 담합조사 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이제 공권력에까지 도전하겠다는 것이냐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졌다.
그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권력기구나 집단으로는 정치인, 고위관료, 검찰, 언론 등이 꼽혔다. 그러나 이제는 재벌과 재벌총수, 그 핵심 경영인들로 바뀌고 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91년 대선에 출마할 때 그 이유로, 정치인들에 다시는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황은 10여년만에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